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9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먼발치에서라도 자주 대하다 보니 그 아이의 습성이나 행동거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가 한곳에 멈추어 무엇인가에 몰두를 하고 있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그럴싸한 먹거리를 발견하였다거나 지나가는 뱀을 발견하고 나서 경계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그 아이가 나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었다거나 얼마나 기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구태여
생각할 바가 아니다. 내가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은 내가 이제껏 갚지 못하고 있는 빚 때문 일
게다. 그것도 아주 창피하고 치사한 빚, 누구에게도 밝힐 수도 없는 부끄러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리라.
샘물에 사카린을 타서 마시는 이웃을 부러워했던 나에게 군것질 같은 것은 당치도 않을 때였으니 당시의 내
행위에 대하여 그 아이도 조금은 이해를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우리보다는 몇 십 배나 여유 있게
사는 안채에서는 하루 세 때의 식사 말고도 군것질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하루는 그 집 대청의 미닫이 유리문이
열리고 놋쇠로 된 재떨이에 담겨있는 쓰레기가 마당 한가운데로 휙 던져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그 아이는
쪼르르 달려가 이것저것을 뒤적이다가 무언가 기다란 것 하나를 찾아 물고는 나무 밑으로 다가서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감 껍질이었다. 내 눈에도 번쩍 띄었다. 번뜩 저것을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금살금
뒤쪽으로 다가가 갑자기 ‘얍’ 하는 기압소리와 함께 내달으니 다시 입에 물어 올릴 틈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생존의
경쟁에서
승리를
한
것이다. 껍질의
안쪽부분에는
담뱃재가
묻어
있었다. 나는
얼른
집어
들어
바짓가랑이에 두어 번 쓱쓱 문대고 나서는 덥석 입에 물었다. 담뱃진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순간에 삼켜버리기에도 아까운 맛이었던 것 같다.
약 병아리의 크기를 넘어 벼슬이 빨개지며 가끔 허스키 목소리로 알 젖는 소리를 연습하던 그 아이.
머리
부분은 흰색에 가까운 연회색, 앞가슴에서 몸통 쪽으로 내려오면서 약간씩 진해지는 색깔로 덮여 있었다. 꼬리
부분은 검은 색을 띠고 있는 전형적인 토종 닭이었다. 횡재를 만난 줄 알았던 그 먹거리를 약탈당한 데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쳐들고 신경질적으로 꼬꼬댁 거리는 걸 보니 약간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쟁취한 이 전리품을 되돌려 줄만한 나의 인품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 후 그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갔을까. 그나마 운이 있었다면 씨암탉으로 남아있으면서 주인집에
때맞추어 달걀을 공급해 주었겠지. 어쩌면 일찌감치 조 부모님의 보양을 위해 몸이 바쳐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안하다. 부끄럽기도 하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자기의 의지대로 생각을 했을 테고 결정했을 것이며
행하기도
했을
그런
아이를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부모도
형제도
없으면서도
외로워
보이지도
않던
그
아이. 그러면서도 허약해 보이지도 않던 그 아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향유할 줄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로부터의 이끌림이나 제재가 없이도 비뚤어짐 없이 모두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던 그
아이가 우러러 보이기도 했었다.
어린 자식에게 전병쪼가리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하면서도 “이래라 저래라”, “해라 말아라”만을 반복하시던
부모님의 능력이나 책임감 같은 것에 대한 원망이나 아쉬움 같은 것을 생각할 줄도 몰랐던 나는 그 아이의 자유와
생명력 또는 의지에 대하여 선망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모습을 생각하니 나이 예순을 넘겨버린 오늘의
내 모습에서 무한한 무기력증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두 눈을 가지고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했으며 뚫린 귀와
입을 가지고 바로 듣거나 바른 말 한마디도 못해온 세월.
배고픔을 통해 한 톨의 곡식에 대한 가치를 알게 해주고
어떤 행위에 대한 책임이나 판단이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길들여주신 부모님에 대한 이해를 이제야 하게 되다니.
내가 만일 최소한 그 아이만큼의 자생능력을 가지고 자기 나름의 확고한 의지대로 살아 왔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에게는 잘 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소극성보다는 잘해보겠다는 적극성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태어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자생의 능력을 터득하고 있었던 그 아이에 비하면 이 나이의 나는
아직도 요 모양 요 꼴이니. 오늘따라 그 아이를 닮아지고 싶다. 그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겠지만 내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아이의 모습이다.
보고 싶기도 하다.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