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1
분야에 경험이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질문이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우선 우편이나 팩스로 이력서를 보내라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화하는 동안에 인터뷰를 할 날짜와 시간을 정해주었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한인 타운에서 멀지 않은 지역의 회사를 찾아보았다. 그날 무역관련 직원을 구한다는
회사들 중에 집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회사와의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각 회사마다 인터뷰를 하는 데는
각각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제까지 내가 담당해온 업무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과 응답을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타이핑도 시켜보고 미니컴퓨터로 서류작성을 해 보이기도 했고 원활하고 효율적인 업무처리를 위한
나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학력에 대하여는 묻지도 않았다. 물론 이력서에는 학력을 적어 놓았으니
물을 필요도 없었겠지만 학력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 두 회사 모두가 나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두 회사 중에 어느 쪽을 택해야 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직장을 골라서 선택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오전에 만났던 회사는 규모도 크고 시설이나 조직 면에서도 다른 회사보다는 훨씬 틀에 잡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급료도 다소 높았다. 세계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어 각 나라마다의 시간차(Time
Zone)가 있어 하루 스물 네 시간을 가동하고 있는 회사였다. 직원들의 근무시간도 하루 삼 교대로 나누어서
실시하는데 나는 오후 세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하는 팀에 투입을 하겠다고 하여 포기를 해야 했다. 다섯 살짜리와
한 살 반짜리 아이를 아내와 번갈아 가며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스터 모리스 스탁(Morris Stark)이 사장으로 있는 이스트 웨스트 사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분의
인품이랄까, 대화를 통하여 그에게서 무언가 끌리는 데가 있었다. 그는 헝가리 태생 유태인으로서 이차대전시
피난민으로 떠돌다가 미국에까지 오게 되었다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도 들려주기도 했다. 채용을 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나의 엉뚱한 말로 당황케 했던 나의 말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실은 지난 일주일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러 한국계 업체에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얻지 못했습니다. 미스터 스탁은 나에게 학력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아 다소 의아 했었습니다. 이러한 나를 선뜻 채용해 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그러자 “내가
당신과의 인터뷰를 하고자 한 것은 당신이 우리의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당신은 훌륭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악수를 청해오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 번쯤은 차를 갓길에 세워야 했다. 직장을 잡게 되었다는 안도감이나 기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분을 사기기 위해서였을 게다. 한국계 회사들. 그들의 눈높이를 개인의 능력보다는 까짓 학력
같은 것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데에 대한 불쾌감에서였을 것이다. 하기야 한국에서도 구인광고는 커다랗게 내놓고
산더미처럼 날라 온 이력서를 보고 소위 이 삼류 대학이나 지방대학 출신의 서류는 볼 것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지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고려의 대상으로도 삼으려
하지 않은 그들은 얼마나 화려한 학력의 소유자이며 어떤 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내 모습을 되돌아본다. 보고 또 돌아다봐도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학력이나 경력 외에도 또 다른
면에서의 평가를 받게 될 경우 나를 바라다보는 시각은 어떻게 비추어 질까를 생각해 보니 몸도 마음도
움츠려진다. 길고 긴 시간만을 덧없이 흘려 보내고 말았다는 깨우침만 떠오를 뿐이다. 거들떠 볼만한 최소한의
기준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된 내게 자존심 같은 게 있기나 했을까. 분을 사기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처량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짧게 느껴지고 있는 지금. 앞으로의 모습, 나를 보는 눈높이는 얼마나 더 낮은 구렁으로 빠져들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니 잔뜩 긴장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