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43
글만을 써보겠다는 욕심에서이기도 하다. 순전히 나만의 생각과 나만의 느낌에 의한 순도(純度) 백 퍼센트의
내 글이 돼야겠다는 생각에서라고나 할까. 창작이라는 이름아래 순전히 나 자신만의 글이 돼야겠다는 나름대
로의 고집, 처녀성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어떤 때 시 한편을 쓰려고 할 때 적당
한 시어를 건져보려고 머리를 쓰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나와 있던 단어나 문장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뒤늦게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를 찾아 읽어봤다. 그분의 그 작품을 읽어보고 싶기
도 했지만 그분의 글이 어떤 내용이었기에 내가 지도교수로부터 그런 지적을 받아야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대로 보는 눈이나 생각의 깊이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안목으로는 제목은 같
았지만 내용면에서 나의 시와 비슷한 이미지와 같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낙엽을 태
우면서 느끼며 생각하고 있는 각도는 물론 쓰게 된 동기나 배경 또한 나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쓴 졸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개 이렇다.
갈잎 모아 불태우며 / 짙푸르던 지난여름 돌아본다 / / 더러는 묻어 버리고 / 더러는 날려 보내고 / 지워버리고
싶은 흔적들 / 떡갈나무 잎 속에 묻어본다 / / 몸부림치다 오그라드는 / 잎새들 사이에 섞여 / 피어 오르는 연기
와 함께 / 날아가 버렸으면 좋았으련만 / 남아있는 회색 빛 잿더미만 / 흉물스럽다 / / 아프고 쓰린 흔적들만 /
잿더미 위에 진하게 남겨둔 채……. <본인의 시 ‘낙옆을 태우며’ 전문>
우리 집 뒷마당에는 여러 가지 나무로 가득 차 있다. 과일나무도 있고 다년생 꽃나무들도 있는데 가을이
되면 마당은 온통 낙엽으로 덮이게 된다. 낙엽이 하도 많아서 시에서 수거해가는 쓰레기통에 꾹꾹 눌러 담아
도 모두를 채울 수가 없어 처리하기가 어렵다. 부엽토를 만들기 위해 구덩이를 파서 묻기도 하지만 그 많은
낙엽을 묻기 위해서는 뒷마당 전체를 파헤쳐도 모자랄 형편이다. 하는 수 없이 남아있는 잎들을 모아 태우기
도 한다. 불타오르는 낙엽들을 바라다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써본 것이었다. 불길에 몸부림치며 오그라
드는 갈잎을 바라다보고 있으려니 무성하고 짙푸르던 지난여름의 색깔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다보면 허무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한 지금의 알량한 모습을 바라다보며 독백을 하고 있는
그러한 분위기를 느끼게도 된다.
이효석님의 글은 나와는 전혀 다른, 어찌 보면 상반된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 많다는 느낌이다. 타
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의기소침해 있는 나에 비하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라거나 <
새빨갛게 피어 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
은, 그 무슨 신성(神聖)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고도 했고 마지막에는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些事)
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 가는 가을, 이 벌거숭이
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로 끝을 내고 있다. 이효석님의 글에서는 힘이 솟고 삶의 보람
과 희망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다.
이쯤 되면 알량하지만 구태여 나의 <낙엽을 태우며>를 없애버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내용 즉 이
미지가 같지 않으니 제목쯤이야 좀 용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같은 제목의 글로 된 영화, 음악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작으나마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써진 내 글의 <처녀성>을 놓치고 싶지가 않으니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