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35
밤 차
자정이 다 된 이 시간에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을까. 마치 서울의 명동 거리에서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틈
새를 지나치며 다른 사람들의 어깨를 스치는 일이 자주 생겼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국내선은 물론 유럽 각
도시를 연결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니 밤낮 없이 붐빈다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지만.
매표소에서 예약해 두었던 표를 받고 나니 승차시간은 아직 삼십여 분이 남아 있었다. 남는 시간에 도시의
야경이나 돌아볼까 하여 광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도시의 야경이란 세계의 어느 곳을 가봐도 거기가 거기지만
그곳이라 하여 눈을 끌만한 차이점은 별로 없었다.
아, 저 냄새. 갑자기 무슨 냄새가 무딘 나의 후각을 자극해 왔다. 호텔을 나설 때 식사를 하고 나왔으니 아
직 배가 고플 때가 아닌데도 침이 고인다. 하기야 식사를 한지도 두어 시간이 지났으니 간단한 요기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파리까지는 아홉 시간 이상이 걸리는데 그 동안에 배가 고파질 것을 대비해 둘 필요
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역사(驛舍) 앞 광장 한 모퉁이의 조그만 후드 스탠드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사방 이
~삼 피트 정도 크기의 철판 위에는 어른의 손바닥 크기의 고기덩어리와 굵게 채 썬 양파가 지글거리고 있었
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종이접시에 담아주는 그릴드 포크를 받아 들었다. 그때까지 먹어본 어떤 종류의 고기
요리보다도 맛이 좋았다. 보드라우면서도 쫄깃하고 고소한 그 맛. 전혀 시장기를 느끼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된다면 추가 주문을 해서라도 한 덩어리쯤 더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정에 떠나는 열차를 타게 된 동기 또한 복잡하다. 한국에서 온 김사장과의 동행이었는데 노르웨이의 오
슬로를 거쳐 핀란드의 헬싱키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일을 마치게 되면 곧바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올 계
획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부터 연락이 와 갑자기 파리까지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갑작스레
비행기 표를 구입하려니 자리가 없었다. 대기자 명단에도 이미 여러 사람이 올라있어 가능성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프랑크푸르트 발 파리 행 마지막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침대 칸의 가격은 비행기 값보다도 더 높아 일반석을 택했다. 일반석이라고는 하지만 각 방마다 도어가 따
로 달린 완전히 칸막이가 된 방이었다. 방마다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
런데 이런 경우에도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 모르겠다. 자정이 넘어 떠나는 야간열차에는 방이 텅
텅 비어 있었다. 한 방에 모두 여섯 명이 타는 방에는 김사장과 나 단 두 사람뿐이었다.
야호. 긴 의자 하나씩을 차지해 누울 수가 있었으니 침대차가 뭐 따로 있을까. 작은 가방을 베개삼고 벗어
걸어놨던 겉옷은 담요로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똑같은 열차에 몇 배나 비싼 비용을 들이고 누어있을
침대 칸 손님들이 부러울 게 없었다. 아침 아홉 시에 도착하게 되니까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낼 수 있는 비즈니
스 미팅을 끝내고 나면 로스앤젤레스 행 밤 비행기 시간까지는 열 시간 정도가 남아있게 된다. 첫 번째 파리
여행시 가보지 못한 곳을 돌아볼 수도 있게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하룻밤에 몇 백 달러씩 하는 호텔 비까
지 절약할 수도 있었으니 이번 여행에서 업무를 떠나 또 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데에는 만족 그 이상의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국경을 지날 때 승무원이 여권 체크를 위해 잠깐 들렸을 때를 빼놓고는 먼동이 트기 시작할 때까지 꿈까지
꿔가면서까지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프랑스 영토에 들어선지도 한참은 된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시간이
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철로 변 주택가는 한산했다. 집집마다 사과나무가 많기로는 프랑크푸르트의 주택가와
비슷했다. 나뭇가지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길바닥에는 많은 열매들이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들렸던 애플 와인 집이 생각난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문을 닫는 대부분의 업소들에 비
해 늦은 시간까지도 여는 곳이기도 했다. 즉석에서 싱싱한 사과로 즙을 짜서 와인을 만들어 파는 곳이다. 그
지역 토박이이며 나와 동갑내기 친구인 피터 뮬러의 안내로 가본 곳인데 애플와인의 맛을 본다기 보다는 운치
가 넘치는 그 집의 분위기가 더 좋았다. 싱싱한 사과에서 짜낸 즉석 와인은 얼핏 주스 같기도 하지만 즉석 발
효가 된 것은 아닐 터인데도 와인의 맛이 나는 것은 서빙을 할 때 알코홀 성분을 가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일정이 갑자기 바꿔진 데 대한 불평 같은 것은 사라졌고 덤으로 생긴 파리 여행까지 추가 되었으니
억울할 게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의 유럽여행이 수박 겉핥기 식이었다면 이번엔 지난번에 빠졌던 곳을 가볼
수도 있었고 한번 가봤던 곳도 보다 자세히 돌아볼 수가 있었으니 득이면 득이었지 손해 될 것은 없었다.
항공노선 변경으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페널티가 전혀 아깝지도 않았다. 그런 변동이 없었더라면 어느 세
월에 야간열차에 누어 꿈까지 꿔가며 유럽의 광야를 달릴 수 있었으며 한밤중에 역 광장의 노점에 서서 그릴
드 포크의 맛을 볼 수 있던 추억거리를 남길 수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