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34

일주일의 휴가 - 만일 내게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진다면난파선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의 판때기에 매달려 무인고도에 표류된 21세기의 로빈슨 크루소우가 된다. 실제로 그 배가 난파선이었다면 선주에게는 재산상의 피해도 있었을 것이고 몇 명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포함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인명피해 같은 불행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러니 난파선이라기보다 는 차라리 타고 온 배가 나만을 무인도에 덜렁 내려놓고 떠나 버렸다고 해 두자.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나 혼자서 일인용 소형 보트나 뗏목을 타고 가다가 심한 파도에 보트인지 뗏목인지를 잃고 무인고도에 표류되었 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육지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게 되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가족도 친 지 또는 인간이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는 세계에 와 있게 되는 셈이 되겠다. 그 흔해빠진 휴대용 전화나 아이 패드 같은 것도 없는 무인도에서 세상이나 인간과는 완전히 단절이 돼있는 상황에 놓여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 영역을 침범한 낯선 생명체가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섬의 터줏대감인 동물들이 코를 벌름 거리며 기웃거리기도 할 것이고 물새들은 주변 하늘을 맴돌며 '끼악, 끼악' 소리를 지르며 저들끼리 경고의 신 호를 건네기도 하겠지. 밤이 되면 식어져 가는 백사장에 누어 별빛을 바라다 보며 무언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도 마련 될 것이다. 이런 곳에 혼자 동떨어져 있으면서 한번쯤은 고독이라는 것도, 외로움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거나 느껴보게도 되겠지. 그러다 보면 아귀다툼 같은 세상살이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세상 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보게 될 것도 같다. 더러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세상을 사는 맛'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마른 풀잎과 나뭇가지를 모아 놓고 부싯돌로 불씨를 만들어 물 속 바위에 붙어 있는 굴이나 홍합 같은 것 을 따다가 익혀 먹는 체험도 해 보고도 싶다. 불씨가 일지 않으면 날것으로 먹으면 또 어떠랴. 야생의 열매나 풀도 며칠간의 한 생명을 이어 가는데 도움이 되겠지. 마치 태곳적 야생의 생물체들처럼.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는 해나 달이 뜨고 지는 그 횟수에 의해서만 계산이 가능했던 지난 일주일이 지나고 있을 때 멀찌감치 지나가는 고깃배 하나가 눈에 뜨인다. 나의 존재를 알리고 구조요청이라도 해볼까 하여 마 른풀을 태워 연기를 피운다. 옷가지를 벗어 흔들어 본다. 그 배가 다가온다. 내가 만일 거울을 볼 수가 있다면 햇볕에 그을리고, 텁수룩하고 초췌해진 몰골이 말이 아니겠지.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 볼 수가 없을 만큼 변한 전혀 딴 판의 모습을 하고 있겠지. 일주일이 아니라 몇 달, 몇 년을, 아니 나는 본래부터 이런 곳에서 태곳적 원시인처럼 살아오고 있었다는 착각 속에 빠져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난생 처음 뭍에 나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나가 보 게 되는 것이다. 문화나 문명의 엄청난 차이에 놀라며 어리둥절해 하겠지. 집이라고 돌아오니 몇 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오며 정들어온 녀석들, 기어오르고 꼬리 치며 아양을 떨던 ' 진저'와 '코지'가 제 주인도 몰라보고 짖어댄다. 개 짖는 소리에 아이들이 창문 틈으로 삐끗 내다보며 "엄마, 누가 왔어."라며 아내를 부른다. 망할 것들, 제 아비도 몰라본다. 현관문을 빼 꼼이 열고 "누구세요". 제 남편도 몰라보는 마누라. * 화씨 백도가 오르내리는 이 무더위에 한번쯤 이러한 상황에 빠져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