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28
현해탄의 구름다리
덧니를 내놓고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세라 복 차림의 이 여학생을 만나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해외
펜팔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영어 선생님이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해외
학생들과의 펜팔을 권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편지를 통해 같은 또래의 해외 학생들과 교류를 한다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이 구해온 외국학생들의 주소록에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골라 편지쓰기를 시
작하게 되었다. 백 여명이 넘는 주소록에서 나는 세 명을 골랐다. 미국, 일본, 스위스 학생이었는데 모두가 여
학생들이었다.
편지는 물론 영어로 써야 했다. 영어에 특별한 실력이나 재질도 없는 나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내 편지를 읽게 하려면 다른 대책도 없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나누어준 예문
편지 몇 가지 중에서 짜깁기를 해가며 그럭저럭 해결이 됐지만 앞으로가 문제일 것 같았다.
어렵사리 편지 하나가 완성되면 똑 같은 내용의 편지에 수신자이름과 주소만 각각 따로 준비하여 세 곳으
로 보내면 됐었다. 그들로부터 온 답장도 같은 또래이기 때문이었는지 거의 비슷한 내용의 글들이었다. 다시
답을 쓸 때도 각자마다 약간씩 다른 내용에 대한 문장의 답을 작성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라는 말로 시작된 편지가 왔다. 그녀와의 편지가 시작 된지 약 일년이 지
난 후였다. 그때까지의 편지는 모두 영어로만 써왔었는데 이번에는 본문까지도 일본어로 썼고 마지막에는 다
시 한글로 “안녕히 계시요. 전촌왜자로부터”라고 마무리되어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기
가 살고 있는 시즈오까(靜岡)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어 한국어공부를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이라고도 했다. 편지를 할 때도 가급적이면 한국어로 시도를 할 터이니 틀린 부분을 고쳐달라고도 했었다.
약간은 놀라우면서도 반갑고 고맙기도 했다. “안녕히 계시요”가 아니라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과 그녀의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한글로 표기를 할 때도 ‘전촌왜자’가 아니고 본래의 발음대로 타무라 시즈꼬 (田村倭子)
라고 쓰라는 말도 해주었다. 그녀가 한국어 공부에 얼마나 열정을 쏟았는지에 대하여는 1960년대 후반에 한
국에 와서 살면서 KBS라디오의 국제방송 프로인 대일 방송에서 한국어로 하는 아나운서를 맡게 된 것만 봐
도 알 수가 있었다.
이 참에 나도 일본어롤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입시 준비에도 모자랄 시간에 일본어 책을 사
놓고 독학으로 히라가나와 가다가나를 외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일본어의 문법은 한국어와 거의 비슷해 동사
와 형용사의 변화만 터득 하고 단어만 알아도 문장을 만들 수가 있었다. 일한사전과 한일사전만 있어도 편지
정도는 대충 대충 쓸 수가 있었다. 이제 겨우 나의 일본어의 50음도를 외우기 시작한 주제에도 영어로 쓰는
것보다도 쉬울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나의 일본어 편지에 대하여 기뻐했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기도 했었다.
역시 독학이었지만 일본어 공부는 대학에 가서도 계속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거의 잊어버렸지만 간단한
회화도 가능해졌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할 때도 일본측 거래선들과 간간히 일본어로 말을 나누기도 했었다.
펜팔을 시작한 지 일년쯤 지나서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간에는 매년 고등학교의 친선 농구시합이 있었다.
한국의 전국대회 우승팀을 파견하는데 그때는 서울의 경복고등학교 팀이 파견되었다.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
정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그 경기를 관람하게 되어 팬의 입장에서 이 모 선수를 만나게 되었다. 함께 사진도
찍고 주소도 나누게 되어 또 하나의 한국인 펜팔 친구를 만들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까지
도 편지는 계속 오갔고 종종 이 선수에 관한 이야기들도 들려주곤 했었다.
이 선수는 후에 모 은행의 주전 선수로서 국가대표가 되었다. 결국 그들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예쁜
딸까지 두었다.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금슬이 좋은 부부였나 에 대하여는 신문을 통하여 시즈꼬가 죽었다는
내용의 특종 기사와 함께 실린 내용과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KBS라디오의 연속극을 통해서야 알
게 되었다. 제목은 ‘현해탄의 구름다리’였는데 작가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 전 한운사 선생의 ‘현해탄
은 알고 있다’라는 드라마도 있었는데 같은 작가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편의 퇴근
시간이 되면 아이를 들쳐 업고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가는 것이 하루 일과중의 가장 중요하고 기쁨이 넘치
는 부분이었다고 했다.
장마철, 소낙비가 몹시 심하게 내리던 저녁이었다고 한다. 그날도 예외 없이 우산을 가지고 남편 마중을
나가는 길이었다. 비가 오기 때문에 아이는 집에 맡기고 혼자 나갔다고 했다. 이것이 생과 사의 마지막 갈림
길이 될 줄이야. 심한 폭풍우를 이기지 못해 그 길을 가로지르고 있던 고압선이 끊어져 길가에 패인 웅덩이에
빠져있었다. 끊어진 고압선의 끝부분이 그 웅덩이 물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대로 발을 디뎠던 것
이었다. 한 순간에 한 여인의 꿈과 사랑, 목숨과 육신까지도 숯검정처럼 태워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지금까
지도 내 마음을 적시고 있다.
비록 제비 뽑기 식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