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27
그 후로도 편지는 계속 오갔지만 그날의 일에 대하여는 어느 쪽에서도 거론을 한 적이 없었다. 서로간에
“왜 나오지 않았느냐”라던가 “다른 사정이 있었다”는 등의 자질구레한 이야기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른 새벽, 안개 자욱한 다리 한 복판에서의 첫 만남’이 이루어 졌다면 제법 멋진 광경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짧은 한 장의 편지. 마포대교 일에 대한 말인 듯 했
다. “아저씨는 참 잘생긴 분인가 봐요. 얼굴을 내보이고 싶어하는 걸 보면~”. 이것이 편지 내용의 전부였다.
이제 와서 왜 그 일을 끄집어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쪽에서도 나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생긴 것
일까. 나는 계속 편지는 보내면서도 이에 대한 말은 꺼내지도 않았었다.
그녀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게 된 것은 삼학년이 된 여름이었다. 만 삼 년만이었다. 그녀의 기숙사에서였
다. 여름방학이 되어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기숙사에는 그녀와 식당 아줌마만 남아 있었고 미국인 학장만이
캠퍼스 내의 관저에 남아 있었다. 여느 학교의 기숙사와는 달리 단독 주택 형식의 건물 몇 채가 나눠져 있었
다. 깔끔하게 정돈된 그녀의 방 한 쪽에는 풍금이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 때 보고 난 후 처음으로 보는 풍금
이었는데 요즈음에도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
미리 부탁을 해 놓았는지 식당 아줌마는 저녁상을 마련해 놓고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식사를 마친 후 그
녀는 풍금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며 딥 리버(Deep River)를 부르기 시작했다. 메조 소프라노의 은은한 음색.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혼을 짜내듯 이 노래를 열창하던 마리안 앤더슨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노래를 부
르면서도 계속 창 밖 쪽을 힐끔힐끔 내다보곤 하던 그녀.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학장이 가끔 기숙사를 순시한다
고 했다. 금남의 집인 여학생 혼자 있는 기숙사에 남자가 들어와 있었으니~.
“어머나, 어떡해~”. 사색이 된 그녀. 학장이 기숙사 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다닥 문 쪽으로 가서
내 구두를 들고 와서 내밀며 “이쪽에 앉으세요.” 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엉겁결에 양손에 구두 한 짝씩을
받아 들고 방의 구석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것만으로는 불안스러웠던지 떼어놓은 창호지 창문으로 나를 가
리는 것이었다. 밖 쪽은 유리로 돼 있고 안쪽은 창호지를 바른 이중 창으로 돼 있는 기숙사였는데 여름이고
답답하니까 유리창만 남겨두고 창호지 문은 떼내어 벽에 걸쳐놓고 있었다.
계속 밖을 살피던 그녀는 한참 후 “됐어요. 일어나세요. 다행히 그대로 지나쳐 가셨네요.”라며 창문을 치워
주었다. 아직도 나의 양손엔 구두 한 짝씩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십 여 년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서울의 모 의과대학
에 다녔던 그녀의 친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커피를 시켜놓고는 다짜고짜로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질질 끌고 갈 작정이세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로 이어져간 이야기는 ‘결
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역정을 내는듯한 목소리였다. 여자가 나이는 차 가
고 집에서는 난리, 본인 또한 저러고만 있으니 옆에서 보기에 하도 답답하고 딱해서 나서게 됐다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그녀와의 사이에 이런 문제가 제기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녀를 만난 이래 그녀와의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성
인 남녀간의 만남이었으니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글을 나누며 아름다운 대화와 생각을 나
눌 수 있는 친구 이상의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었다. 신 학생이었던 그녀를 마치 동정녀 마리아를 마음 속에
담아둔 채 간직해 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편지. 십 년 넘게 모아둔 편지를 없애는데도 여러 날이 걸렸다. 불태우기에 앞서 한번씩 읽어봐야만 했으
니 무슨 미련 같은 게 남아서였을까. 몇 상자가 넘게 모아 두었던 그 편지들을 태워 없애는 데 걸린 시간은
아마 일주일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지금 와서 후회가 되기도 한다. 꼭 불을 태워 없애야만 했을까 하는 아
쉬움도 있고. 그 안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곱게 그려진 그림들이 있었다. 사랑과 꿈, 번민과 고
뇌 같은 것도 있었지만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사연들도 많았었는데~.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