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Seite 24

병영에서 만난 친구 한국의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느닷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뭐 유 난히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에서라거나 한국인이라는데 대한 자긍심 같은 게 넘쳐서가 아니다. 감사해야 할 일은 이 사실뿐만이 아니다. 구태여 늘어놓자면, 1940년대에 태어난 내가 이 친구와 같은 세대에 태어났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가 없다. 매 이 삼 년마다 한번씩 있는 법관 이동을 감수해야 하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도 덕택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충청도 오지 출신의 내가 강원도에까지 가게 되었고 나이가 되어 강원도 병력으 로 소집 되었다는 사실도 그렇다. 이런 연유로 인해 나에게는 반세기가 되도록 수시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 거리를 간직해 오며 수시로 떠올리게 되지 않았던가. 내가 입대를 하기 전 두어 차례 소집영장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대학의 상급학년이 되어 졸업 후 에 입대하기 위해 연기를 해 오고 있었다. 이 또한 추억거리를 장식할만한 좋은 계기가 되었으니 감사할 일을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졸업을 하자 마자 자원입대 신청을 했지만 그 해가 한참 지나간 후에야 입대를 할 수 있었다. 입소를 하고 보니 다른 훈련병들과의 평균나이는 적어도 한 살에서 두세 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경우 도 있었다. 삶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얼굴들, 싫든 좋든 훈련을 마칠 때까지 고락을 함께 해 야할 전우들과의 만남. 내무반의 내 바로 옆자리에서 관물대를 정리하고 있던 훈련병. 마음속으로 ‘흠, 훈련기간 동안 나와의 대화 가 가장 많이 하게 될 친구가 되겠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관심이 쏠리기도 했었다. 얼굴이 도톰하고 선한 모 습을 하고 있는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출신의 ‘최덕종’. 통성명을 할 때 보여준 미소 또한 천진스러웠고 동해 안에 가까운 지역의 강원도 액센트에는 더더욱 정감이 가기도 했었다. 집합을 하여 행군을 할 때나 식사를 할 때도 항상 서로의 옆자리를 찾게 되었다. 막간의 휴식 시간에도 서 로 두리번거리며 찾는 것은 물론 취침 시간에도 귓속말로 속닥거리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PX에서 팥 빵 한쪽 을 먹게 될 때도 서로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려야만 했던 바로 그 친구. 그 동안 무슨 이야기들이 나누어 졌는 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짧은 기간 동안 서로가 서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는 것이 반세기가 돼가 는 이때까지 추스르게 됐다는 야기가 되겠다. 불과 몇 주간의 훈련기간 동안 쌓인 정이라 해 봤자 그게 얼마나 될 것이며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라 해 도 그게 얼마나 됐을까. 그런데도 훈련을 마치고 각자의 갈 길로 떠나게 될 때 눈에 눈물까지 고일 정도였으 니 이는 여간 한 인연이 아니지 않는가. 그가 백마부대 요원으로 차출되어 베트남으로 출국할 때 마지막 환송 의 장소에까지 나가서 건투를 비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