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21

제 3부 가을에 온 편지 동창생 「이학년 일반 ‘박’ 아무개하고 ‘장’ 아무개는 그렇고 그런 사이」 육십 여 년 전 초등학교 때 방향이 같은 등굣길을 함께 걸었던 게 학급 아이들의 눈에 뜨여 나돈 소문이었다. 함께 걸었다고는 하지만 바로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라도 나누며 걸었던 것은 아니다. 얼마의 간격 이 있었고 더러는 옆자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대개 한 두 발짝씩 앞서거나 뒤서기도 하며 그냥 가까운 간격으 로 걷게 되었던 등하굣길이었을 뿐이다. ‘얼러리 껄러리’ 놀림도 받았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변소 깐의 널빤지 벽에는 분필로 쓴「박 XX는 신랑, 장 XX는 각시」라는 낙서가 써 있기도 했었다. 고향을 떠난 지 육십 년이 넘고 있는 지금 그때의 내 각시라던 그 아이가 보고 싶다. 연전 고향 방문길에 육촌 누나에게 그녀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 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몇 년 전 누군가로부터 ‘아들 딸 여럿에 손자 손녀도 여럿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 은 게 그 아이에 대한 소식의 전부이며 마지막이라고 했다. 당시 집안 형편상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돌보다가 군산에 있는 모 구두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고 한다. 그러다가 같은 공장의 한 남자 종업원과 눈이 맞아 아예 집을 뛰쳐나가버렸다고 한다. 이게 맞는 소 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나만큼은 늙었을 게고 당연히 자식들 손자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 리고 있으리라. 등교를 해야 할 때면 사립문밖을 얼쩡거리며 그 아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었다. 널따란 한길을 놔두고 풀 잎에 맺힌 이슬방울에 바지자락을 적셔가며 논둑 길로 달음질 쳤었다. 그 아이의 뒤에 바짝 따라붙기도 했던 지난 날의 기억이 새롭다. 그러면서도 단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도 못한 채 숨만 껄떡거리며 따라 걷기만 했었 던 그 시절. 한번쯤 만나 볼 수는 없을까. 곱살한 눈매에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던 그 아이. 얼굴도 참 뽀얗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