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15
검정 고무신
“참 오랜만에 보게 되네요.
옛날 생각이 나는 군요.”
보는 사람마다 한마다 씩 한다. 오래 전부터 갖고 싶어했던 것이다. 한국에 갈 때마다 업소들을 다녀봤지
만 “그런 게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며 마치 이 시대에 그런걸 찾고 있는 내가 의아스럽다는 듯한 표정들이
었다. 지난 번 한국 방문 때 여동생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찾게 되었다. 횡재를 만난듯한 기분이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단 하루도 이것을 대하지 않던 때가 없었지만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물결의 뒤 안
으로 물러난 지도 오래되었다. 작은 생활용품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실용도 외에도 시각적으로도 눈길을 끌어
내기 위한 디자인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겉 모양이야 뭐 그저 그렇다. 그런 걸 오래 전부터 찾고 있었던 데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다. 간단하
고 단순하지만 아무 때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그런데도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를 그리는
것처럼 수시로 떠오르는 것은 아마 그냥 정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어서 였을까.
별다른 놀이기구가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다목적 놀이기구의 역할도 해 주었다. 개울에서 송사리나 가재새
끼 또는 물방개를 건질 때는 어구로서는 물론 임시로 가두어 두는 조그만 어항의 역할까지도 했다. 한쪽을 뒤
집어 꺾어 다른 한쪽의 오목 패인 부분에 구겨 넣으면 자동차의 모양이 되어 입으로는 부웅 부웅~ 소리를 내
며 밀고 다니기도 했고 물위에 띄우면 배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한 효용 가치를 따지게 된다면 뭐니뭐니해도 우리 생활에 있어서 떼어 놓을 수 없는 필
수품으로서의 가치라 하겠다. 모양이라도 좀 내보고 싶어도 운동화를 신어 본다는 것은 겨우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한 두 켤레 정도나 되었을까. 마른 땅이나 젖은 땅, 진흙탕 아니면 자갈밭을 거닐 때도 그랬고 눈이
오나 비가 와도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전천후 생활용품이라고 할만도 했다.
하지만 요모조모 뜯어놓고 보면 볼품이 전혀 없는 것만도 아니다. 패션의 시대에서 코디의 역할이 훌륭한
조화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시간과 장소에 따른 조화가 그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턱시도에
이런 것을 신고 나서게 된다면 시선들이 모아지기는 하겠지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치 도포에 갓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처럼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고전 한복에 하이힐을 신고 나서는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꼭 이것이 있어야만 딱 어울리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색이 바랜 밀집모자에 삼베고쟁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이것을 신고 소를 몰고 가는 농부의 모습에서
는 고향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비단으로 된 바지저고리에 조끼나 마고자까지 입은 상태에서 색깔에 맞춰
신는다고 해도 크게 흠이 될 것 같지가 않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차림에서도 어울릴 수 있으니 용도치고는
쓸만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나이키 운동화나 가죽 구두가 어울리겠는가.
그러나 나에게는 뭐니뭐니해도 편리해서 좋다. 실내화로도 무난하고 뒷마당에서 정원 일을 할 때도 제격이
다.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땅을 파거나 고를 때 그 안으로 흙이 들어가면 일일이 벗어서 털어내고 다시 신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의 템포나 리듬을 멈추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뒤꿈
치 쪽을 살짝 들어올리고 발가락 끝에만 걸쳐서 앞뒤로 몇 번 흔들어주기만 하면 그 안의 흙이나 고인 물을
털어낼 수도 있다. 아내가 창문을 열고 “점심 먹고 해”라고 소리를 지르면 “응, 알았어” 라는 말과 함께 수도
호수로 물을 뿌려 씻은 후 역시 발가락에만 걸치고 몇 번 흔들어만 주면 끝이다. 물기를 말릴 때도 계단 끝에
뒤꿈치 쪽을 밖으로 약간 나오게 하여 거꾸로 엎어놓으면 몇 분이면 마른다. 운동화나 가죽구두에서 이러한
편리성이나 효용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고안된 것이 우리 나라 말고도 세계 어느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사실 모양으로 본다면
볼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