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14

짝사랑 ‘선생님 가족을 이웃으로 모시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저는 선생님의 댁에서 서쪽으로 다섯 번째 집에 살고 있습니다. 오가는 길에 시간이 되시면 잠깐씩 들려 차라도 나누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뒷마당에서 딴 아보카도 열매 한 상자 속에 넣어 그 집 앞 입구에 놔둔 편지의 내용이다. 주소와 전화번호 에 이 메일 주소까지 적어두었다. 걸어서 이 삼분 거리에 한국인 이웃이 생겼다는데 대한 반가운 마음으로 서 로 오가는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른 아침 걷기 운동을 나가자면 항상 그 집 앞을 지나치게 된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기가 일수 였다. 그날 따라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드라이브 웨이 입구에 낯익은 플라스틱 백이 눈에 뜨였다. 그 집으로 배달 된 한국신문.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니 분명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이사를 자주 오가는 곳이 아니다. 대를 이어 살아오는 사람도 많고 한번 이사를 들어오면 옮기려 하지도 않는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쇼핑센터, 공공도서관, 골프장, 경마장, 식물원을 비롯한 여러 개 의 공원이 있다. 각 학교의 운동장은 학과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죠깅이나 걷기운동을 할 수있도록 이른 아 침부터 밤 열시까지 항상 개방을 해 둔다.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퍼블릭 테니스장 등 편의 시설이 많 아 생활에 편리한 점도 많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캘리포니아 전체에서도 상위권에 들어있는 학군이어서 타 지 역에 살고 있는 이들도 오고 싶어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아시안 계 특히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 을 때는 학생 수가 이천 여명이 넘는 고등학교에는 흑인이나 중남미계통의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시안 계 학생이라고는 전체 학생 중에 대여섯 명에 불과 했었다. 지금은 한국학생 수도 전보다는 늘어났지 만 중국학생들의 숫자에는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 상자를 놔두고 온지 일주일, 한 달, 일년, 이년도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은 오지 않고 있다. 어쩌다 그 집 앞을 지나다가 드라이브 웨이에 자동차가 서 있으면 집 안에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직접 들 려 인사라도 드릴까하는 생각도 해 보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로 남의 집에 불쑥 들어선다는 것도 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발을 멈추고 되돌아서곤 했었다. 삼십여 년 전 처음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부터의 세월을 되돌아 본다. 미국에서의 첫 기착지인 테네시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를 하게 된 날부터의 이야기가 되겠다. 로스앤 젤리스에서 두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아파트 구하기조차 힘들었지만 가까스로 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던 곳이 한인 타운이었다. 여덟 세대 중 한 집만 빼놓고 모두 한국 분들이었다. 짐을 풀기도 전에 이웃들에게 인사부터 해야겠다 싶어 방문을 나섰다. 우 선 우리 집과 마주 보이는 첫 집의 문부터 두드렸다. 노크를 하자 안전을 위해 도어에 설치해 둔 체인을 풀지 도 않은 채 그 틈새로 빼꼼히 내다보며 “무슨 일이시죠?”라고 마치 경계를 하는 듯한 태도였다. “오늘 이사를 오게 되어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라며 이름과 어디서 왔는지 말씀 드렸다. “그러세요?”라 는 한마디 말을 하고는 그 이상의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다. 문의 체인은 아직도 걸려있는 채였고 그분의 손 은 손잡이를 그대로 잡고 있는 채였다. 마치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는 듯 빤히 바라다 보고만 있을 뿐이었 다. 또 다른 옆집, 이층에 있는 둘 째, 셋째 집에서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나머지 집들도 다를 게 없을 것이라 는 생각이 들어 하던 짓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곳에 살던 삼 년 동안에도 그들과 의 대화는 없었다. 첫 삼 년을 지냈던 테네시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조그만 타운에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네 식 구가 전부였던 그곳에서는 그래도 이웃간에 정을 나누며 사랑과 배려 속에서 살아온 기간이었다. 일간지에서 도 우리가족을 사진과 함께 소개해 주기도 했었다. 만나서 기쁘고 헤어져 있으면 아쉬우며 그리워지기도 하는 정서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자기들 이웃으로 한국인 가정이 정착하게 된 것을 환영한다며 오가는 길에 들려 문 앞에 음료수 박스나 과 일 바구니 또는 이런 저런 생활용품이 담긴 상자에 환영의 편지를 남겨두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