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Magazine | Pag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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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월의 망자
“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by 안혜성
도산은 섬( 島) 과 산( 山) 이라는 뜻이다. 미국으로 가던 뱃길에서 하와이를 본 안창호는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섬의 웅장함에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 이라 지었다.
안창호는 뛰어난 연설가였다. 그의 깊은 애국심이 묻어나는 웅변에 감동한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19세 때 만민공동회에서 첫 연설을 했다. 당시 연설장에 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됐다.
안창호의 장남 안필립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첫 번째 한국인 배우로, 2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필( 必)’ 에‘ 일어날 립( 立)’ 으로, 여기엔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안창호의 의지가 담겨있다.
국내에는 강남구의 도산대로가 있고, 미국 L. A. 에는 도산 안창호 거리가 있다. 미국의 리버사이드 시에는 안창호 동상이 서 있으며 도산 안창호의 날까지 지정되어 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조직을 결성했다. 1907년 신민회, 1909년 청년학우회, 1912 년 대한인국민회, 1913 년 흥사단, 1918 년 한국독립당 등의 독립활동 단체가 모두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을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은 닥치는 대로 독립운동가를 잡아갔는데, 이때 체포된 그는 한국으로 압송돼 4년 실형을 받았다. 그는 직접적인 저항보다 실력 양성을 내세우는 독립운동가로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었지만 운 나쁘게 체포된 것. 이 사건은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다.
독립을 위해 선진 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낮에는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 이라고 말하며 번 돈의 반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짓는 데 보탰다.
16세에 전쟁을 겪은 소년 안창호. 우리나라 땅이 다른 나라의 전쟁터가 된 걸 보며 자란 그는 국력을 키워 이런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는 국력을 키우는 데 국민이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었고, 이에‘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 등 세 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인 언더우드학당에서 2년간 공부했다. 학당 입학 후 117 년이 흐른 뒤 선생은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졸업 증서를 받았다. 언더우드학당이 연세대학교의 전신이기 때문. 연세대 관계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성실한 학업 자세와 명예로운 삶의 업적을 기리며 명예 졸업 증서를 수여한다” 고 말했다.
2 6 maxim march 2017
DESIGN 장 정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