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Magazine MAXIM_2017_05_new | Page 45

“ 갑자기 반응이 왔다 . 지붕을 열어달라는 거다 . 햇살 아래 컨버터블 , 게다가 벚꽃 시즌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 엎질러진 물이다 .”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한 참이었는데 , 햇살 아래 컨버터블이라 게다가 벚꽃 시즌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 그때 ‘ 벚꽃 엔딩 ’ 같은 식상한 노래라도 틀어놨다면 사태를 좀 진정시킬 수 있었을 텐데 , 그때는 그 노래가 나오기 전이었다 .
그녀는 악녀였다 . 까무잡잡한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 , 탄력 있는 몸매를 지녔다 . 가슴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적당하게 흔들렸고 , 입술은 빨갛다 . 그녀는 자신이 예쁜 줄 아는 데다 대부분의 남자가 자기와 자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그리고 유학은커녕 해외여행 한번 가본 적 없지만 1960 년대 미국 히피만큼이나 개방적이었다 . 그런데 내가 처음에 뭐라고 했나 . 걔 악녀라니까 . 쉽게 허락하지 않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타입이었다 . 사귀는 동안 계속 빼다가 딱 한 번 천국을 보여준 다음 절교를 선언하고 그 추락을 지켜보는 타입 . 세상에는 그런 여자가 실제로 있는 것이다 . 순진한 남자는 그녀의 몸놀림 하나하나를 잊지 못하고 애원하고 좌절하고 매달리다가 망가져버리는 거다 . 그가 어렵사리 극복하더라도 자신의 손짓 하나로 다시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 저는 악녀입니다 ” 라고 써 붙이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 웬만한 남자는 그 위험한 향기를 구분할 수 있었다 . 물론 그녀는 겁먹고 빼는 남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멋모르고 들이대는 애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 대부분의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기는 , 자기 이상 가는 남자는 없다고 믿는 자신만만한 놈들이 그녀의 타깃이었다 .
나는 애초에 자기가 예쁜 줄 아는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기에 그녀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 그렇다고 그녀의 타깃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 내가 겁먹고 빼는 타입이라고 생각한 건지 , 아니면 애초에 관심 밖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결과적으로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어쨌거나 나는 먼저 다가오는 걸 거절할 정도로 단호한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다만 그녀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몇몇 녀석을 보면서 그녀에게 빠지지 않아서 , 아니 그녀의 먹잇감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이제 진짜 봄인가 봐요 . 땀이 나네 .” 아까 들었던 자동차의 바리톤 흡기음과 화음이라도 맞추려는 것인지 평소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고음으로 뒤이어 내 직급을 불러대던 그녀가 말했다 . 나는 뭔가 지키려고 했던 것을 지키지 못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 그녀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 “ 나랑 자는 상상 , 한 적 있어요 ?” “ 아니 .”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 그녀는 “ 흠 ” 하고 의외라는 건지 알고 있었다는 건지 모를 반응을 하고는 내 자동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 잔근육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두텁고 강력한 근육으로 툭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
“ 야구선수랑 자면 그런 느낌이려나 ? 근데 오빠도 의외로 근육이 많으시네요 ?” 여전히 직급으로 불렀다면 나는 그녀가 의도한 대로 (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한 것으로 추측되는 대로 ) 매달리고 애원하고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나는 이제 벚꽃이 펴도 그녀를 떠올리지 않지만 , 그녀는 왠지 그럴 것 같다 . 그게 별 의미가 없다고 해도 왠지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
진짜 뚜껑 열리는 영상 .
MERCEDES-BENZ SL CLASS
어느 날 , 그녀를 차에 태울 일이 생겼다 . 자주는 아니지만 내 차에 가끔 탄 적이 있고 , 우리는 알고 지내면서 그 어떤 종류의 교감을 나눈 적도 신호를 보낸 적도 없었다 . 우리는 사파리에 공생하는 사자와 호랑이처럼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 같은 사이였다 . 차에 탄 계기도 , 이동하는 이유도 , 주변 상황도 에로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다만 차가 5,000cc짜리 컨버터블이었고 , 벚꽃이 만개한 시점이었다 .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컨버터블을 싫어하기 때문에 당연히 지붕을 닫고 있었는데 , 갑자기 반응이 왔다 .
IMAGE DREAMSTIME
차선을 변경하면서 슬쩍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주자 V8 엔진이 공기를 빨아들이는 낮고 깊은 소리가 났다 . 그러고는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 그건 2L 자동차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자동차가 아니라 배의 가속이라고 느낄 법한 성격의 것이다 . 그 힘의 종류가 다름을 느낀 그녀가 “ 아 , 이래서 큰 차 타는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 하고 말한 것이다 . 그 목소리 톤에 이미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가 묻어 있었다 .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데 , 지붕을 좀 열어달라는 거다 . 머리 헝클어질 텐데 ... 하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
지붕을 열고 달리자 바리톤 가수의 허밍과 흡사한 V8 엔진의 흡기음이 더욱 명확히 들리기 시작했다 . 그녀는 뒤에서 진득하게 밀어주는 가속감이 마음에 드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 벚꽃잎이 하나둘 실내로 들어와 떨어지는데 알다시피 그게 원래 좀 슬로모션이잖아 . 내 멋대로 맺은 거긴 해도 불가침조약이 깨지면
대체 어떤 차였나 궁금했을 텐데 , 그 차는 바로 메르세데스 벤츠의 SL500 이다 . 대한민국에서 이건희 회장 다음으로 많은 차를 사본 (‘ 타본 ’ 이 아니다 ) 지인의 표현을 빌자면 ‘ 내 집 응접실 같은 차 ’ 다 . 편안하고 , 아늑하고 , 따듯하고 , 자유롭다 . 대실로 빌린 여관이나 큰 맘 먹고 체크인한 스위트룸이 아니다 .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내 집의 응접실이라는 게 중요하다 . 물론 당신 집을 상상하지 말고 , 이 차를 소유한 사람의 집을 상상해야 한다 . 이 차보다 비싼 컨버터블은 많지만 , 이보다 풍요롭고 느끼한 것은 드물다 . 이 차의 운전자는 옆에서 페라리 스파이더가 앵앵 대고 람보르기니가 으악 대도 미간에 미동조차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 그 누가 추월해가더라도 콧노래 흥얼거리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 일종의 신경안정제다 .
May 2017 maxim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