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반응이 왔다. 지붕을 열어달라는 거다. 햇살 아래 컨버터블, 게다가 벚꽃 시즌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엎질러진 물이다.”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한 참이었는데, 햇살 아래 컨버터블이라 게다가 벚꽃 시즌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벚꽃 엔딩’ 같은 식상한 노래라도 틀어놨다면 사태를 좀 진정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 노래가 나오기 전이었다.
그녀는 악녀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 탄력 있는 몸매를 지녔다. 가슴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적당하게 흔들렸고, 입술은 빨갛다. 그녀는 자신이 예쁜 줄 아는 데다 대부분의 남자가 자기와 자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학은커녕 해외여행 한번 가본 적 없지만 1960 년대 미국 히피만큼이나 개방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에 뭐라고 했나. 걔 악녀라니까. 쉽게 허락하지 않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타입이었다. 사귀는 동안 계속 빼다가 딱 한 번 천국을 보여준 다음 절교를 선언하고 그 추락을 지켜보는 타입. 세상에는 그런 여자가 실제로 있는 것이다. 순진한 남자는 그녀의 몸놀림 하나하나를 잊지 못하고 애원하고 좌절하고 매달리다가 망가져버리는 거다. 그가 어렵사리 극복하더라도 자신의 손짓 하나로 다시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저는 악녀입니다” 라고 써 붙이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웬만한 남자는 그 위험한 향기를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겁먹고 빼는 남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멋모르고 들이대는 애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의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기는, 자기 이상 가는 남자는 없다고 믿는 자신만만한 놈들이 그녀의 타깃이었다.
나는 애초에 자기가 예쁜 줄 아는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기에 그녀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타깃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겁먹고 빼는 타입이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관심 밖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는 먼저 다가오는 걸 거절할 정도로 단호한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몇몇 녀석을 보면서 그녀에게 빠지지 않아서, 아니 그녀의 먹잇감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이제 진짜 봄인가 봐요. 땀이 나네.” 아까 들었던 자동차의 바리톤 흡기음과 화음이라도 맞추려는 것인지 평소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고음으로 뒤이어 내 직급을 불러대던 그녀가 말했다. 나는 뭔가 지키려고 했던 것을 지키지 못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녀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나랑 자는 상상, 한 적 있어요?”“ 아니.”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는“ 흠” 하고 의외라는 건지 알고 있었다는 건지 모를 반응을 하고는 내 자동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잔근육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두텁고 강력한 근육으로 툭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 야구선수랑 자면 그런 느낌이려나? 근데 오빠도 의외로 근육이 많으시네요?” 여전히 직급으로 불렀다면 나는 그녀가 의도한 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한 것으로 추측되는 대로) 매달리고 애원하고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이제 벚꽃이 펴도 그녀를 떠올리지 않지만, 그녀는 왠지 그럴 것 같다. 그게 별 의미가 없다고 해도 왠지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진짜 뚜껑 열리는 영상.
MERCEDES-BENZ SL CLASS
어느 날, 그녀를 차에 태울 일이 생겼다. 자주는 아니지만 내 차에 가끔 탄 적이 있고, 우리는 알고 지내면서 그 어떤 종류의 교감을 나눈 적도 신호를 보낸 적도 없었다. 우리는 사파리에 공생하는 사자와 호랑이처럼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 같은 사이였다. 차에 탄 계기도, 이동하는 이유도, 주변 상황도 에로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차가 5,000cc짜리 컨버터블이었고, 벚꽃이 만개한 시점이었다.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컨버터블을 싫어하기 때문에 당연히 지붕을 닫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응이 왔다.
IMAGE DREAMSTIME
차선을 변경하면서 슬쩍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주자 V8 엔진이 공기를 빨아들이는 낮고 깊은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2L 자동차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자동차가 아니라 배의 가속이라고 느낄 법한 성격의 것이다. 그 힘의 종류가 다름을 느낀 그녀가“ 아, 이래서 큰 차 타는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말한 것이다. 그 목소리 톤에 이미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가 묻어 있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데, 지붕을 좀 열어달라는 거다. 머리 헝클어질 텐데... 하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붕을 열고 달리자 바리톤 가수의 허밍과 흡사한 V8 엔진의 흡기음이 더욱 명확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에서 진득하게 밀어주는 가속감이 마음에 드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벚꽃잎이 하나둘 실내로 들어와 떨어지는데 알다시피 그게 원래 좀 슬로모션이잖아. 내 멋대로 맺은 거긴 해도 불가침조약이 깨지면
대체 어떤 차였나 궁금했을 텐데, 그 차는 바로 메르세데스 벤츠의 SL500 이다. 대한민국에서 이건희 회장 다음으로 많은 차를 사본(‘ 타본’ 이 아니다) 지인의 표현을 빌자면‘ 내 집 응접실 같은 차’ 다. 편안하고, 아늑하고, 따듯하고, 자유롭다. 대실로 빌린 여관이나 큰 맘 먹고 체크인한 스위트룸이 아니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내 집의 응접실이라는 게 중요하다. 물론 당신 집을 상상하지 말고, 이 차를 소유한 사람의 집을 상상해야 한다. 이 차보다 비싼 컨버터블은 많지만, 이보다 풍요롭고 느끼한 것은 드물다. 이 차의 운전자는 옆에서 페라리 스파이더가 앵앵 대고 람보르기니가 으악 대도 미간에 미동조차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 누가 추월해가더라도 콧노래 흥얼거리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신경안정제다.
May 2017 maxim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