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Magazine MAXIM_2017_05_new | Page 163

그녀는 본인이 양성애자인 걸 어릴 적부터 알았고, 이성애자인 전 여자 친구를 공략했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양성애 경향이 있어.” 여자 친구의 친절한 설명이었다. 남자와 키스한다는 생각만 해도 온갖 폭력적인 충동이 들끓었지만 일단은“ 당연하지” 라고 가짜로 끄덕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는 언제나 섹스에서 시작된다. 전 여자 친구와의 섹스 얘기가 시작되면서 평소와 다른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처럼 여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듯한 관점이 굉장한 이질감을 만들었다. 그녀는 전 여자 친구의 잠자리를 회고하며“ 신음소리에 자의식이 많은 게 별로였다” 고 평했다.“ 말라서 만질 데가 없었는데, 체형은 딱히 상관하지 않는다” 등 심지어 나보다 여자 취향의 폭도 넓었다!‘ 내 신음소리는?’‘ 내 체형은 어때?’ 생전 해본 적 없는 괴상한 질문이 줄줄이 떠올랐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술도 좀 깬 거 같고, 이번엔 아까보다 딱딱한 거 같다. 냅다 두 번째 섹스를 시작했다.
아까는 이성애자와의 섹스였는데, 이번은 양성애자와의 섹스다. 딱히 다른 건 없었다. 나는 변함없이 나를 최고의 남자라고 세뇌하며 섹스에 임했다. 속으로만 외는 불경이니 그녀는 문제없이 나를 받아들였다. 다만 사정 후에는 이성애자 여자 친구와는 절대 겪어본 적 없는, 탈 우주적 철학과 번뇌에 휩싸이게 됐다.‘ 나는 사랑으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나는 지금 여자와 누워있는 것인가’ 결국 불안해하며 또 살살 꼬드기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녀의 천일야화 같은 연애담은 끝이 없었다. 남자 편력은 당연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여자 편력조차 그녀가 훨씬 위였다. 사냥꾼이 사슴을 잡는 마음으로 섹스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둘 다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슴은 물론, 대호도 잡는 명포수. 이제는 알파메일과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아, 알파피메일이구나. 좌우간 알파에 대한 선망과 열등감이 어지럽게 섞여서 여자 친구에게“ 여자는 어떻게 꼬시는 거예요?” 라고 묻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그러면 정말 잘 알려줄 것 같아서, 그러다 혼이 나갈 것 같아서 겨우 참아냈다. 울적한 기분으로 손을 꼭 잡고 모텔을 나섰다.
이후 우리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내 집착 때문이었다. 의심할 게 끝도 없었다. 친한 여자 친구와 술 한잔하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에도 화를 내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났다. 걔랑도 섹스할 수 있으니까. 싸우다 보면 내가 알아서 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번은 호기심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나 같은 남자야 익숙하다는 듯 묻는 대로 답해줬다. 거기선 약간은 피곤하고 울적한,“ 이 관계도 여기까지인가 보네” 라는 성숙한 태도가 느껴졌다. 그걸 감지하면 마치 내가 사슴이 된 것만 같아서, 화들짝 질겁하고 그녀를 교화하려, 갖은 허점을 찾으려 판도라 상자의 바닥까지 헤집었다. 찾아낸다고 찾아낸 허점은 그녀의 게이 친구였다. 그녀는 친한 게이 친구도
몇 있다고 했다. 그중 가장 친한 한 명과는‘ 여자에게 서지 않는 남자’ 란 게 궁금해서 어릴 때 호기심으로 펠라치오를 해봤다고 했다. 물론 발기하지 않았다고.“ 그럼 나도 레즈비언 친구 만들어서,‘ 너 참 신비롭다. 남자에게 흥분하지 않는 여자라니. 존나 신비로우니까 한 번 박아보자’ 고 해도 되겠네?” 라고 쏘아붙였다. 그걸 회심의 반격이라고 비웃음마저 잔뜩 담아서 던져버렸다. 그 비웃음에서 여자 친구는 무언가가 끊어진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웃더니, 그런 거 같다고. 서로 힘드니까 우리 그만 만나자며 예약한 입력어를 틀듯 조용히 헤어짐을 고했다.
질세라 씩씩대며 돌아섰지만, 나는 대체 어디에 화가 났는지도 모를 마음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그러웠고, 내 모든 으름장과 심문에 성실하게 답해줬으니까.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한참 후에야 그때 내 감정을 규정할 수 있었다. 결국 또 역시나, 찌질해보이는 게 관건이었다. 그녀는 내가 정의한 규격 외의 존재였다. 섹스해도 정복하지 못한다는 허망함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그에 비해 내가 죽고 못 사는 소유욕과 우월함은 참 열등하고 편협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을 따라 할 수도, 따라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고추만 으스대면 그만이고, 충분히 만족한다. 그걸 들키는 것도 싫어서 도망친 거다. 게이 고추나 빠는 네가 더러운 거라고 합리화하면서.
판도라의 상자는 그리스 신화다. 최고신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며‘ 절대 열지 말라’ 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너무 궁금해서 몸이 쇠약해질 정도가 된 판도라는 결국 상자를 열어버리고 만다. 그 안에는 인간세계를 이간질하고 재앙을 불러오는 요소가 가득했다. 놀란 판도라가 상자를 닫았을 때는 모든 게 세상 밖으로 퍼져나간 후였고, 어째서인지 상자 안에는 희망만이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왜 재앙이 가득한 상자에 희망 같이 어울리지 않는 게 들어있었는가에 대해선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지만, 가장 그럴싸한 건“ 미래가 보이지 않으므로, 인간은 절망적인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는 해석이다.
신화 속 판도라는 상자 속만 궁금해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그 상자가 무엇인지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나는 그녀와 만나면서 내 상자의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상자의 면은 이성애, 그 선은 찌질과 우월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비교할 남자를 차곡차곡 담는다. 나는 그따위 걸 사랑이라고 여전히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다. 그 안에 내가 우월할 수 있는 희망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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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7 maxim 1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