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Magazine MAXIM_2017_05_new | Page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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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 ual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 by 이석우
사귄 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가 있다 . 우린 방금 첫 섹스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 술에 취해서 고추가 물렁물렁했던 거 같다 . 시간도 짧았던 거 같고 , 하여간 아쉽다 . 눈치가 보여서 알몸을 조금 다소곳하게 오므렸다 . 문득 떠오른 판도라의 상자 . 전 남자 친구 얘기가 궁금해졌다 . 이건 버릇 같아서 , 사귄 지 얼마 안 됐고 첫 섹스를 나눈 후면 자연스러운 수순마냥 상자를 열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 하지만 쉽게 묻기 힘들다 . ‘ 그중 나보다 잘난 놈이 있었으면 어떡하지 ?’ 여기서 잘났느냐의 여부는 돈 , 학력 , 성기 길이 등 온갖 지표가 다 해당한다 . 좌우간 섹스는 내가 최고였으면 좋겠다 . 다른 건 몰라도 섹스로 이기면 다 이긴 기분이다 . 그러나 나는 이 질문을 꺼내지 않을 것이다 . 처음 몇 번의 연애에서 저지른 실수와 후회 끝에 얻어낸 눈물겨운 통찰이다 . 이런 개인사적 질문이 여자에게 얼마나 ‘ 실례 ’ 인지를 깨달아서는 결코 아니다 . 그보다는 찌질하게 여겨지는 게 관건이다 . 만약 당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강 그려주겠다 . 당신은 전 남자 친구들의 우월한 점을 확인하고 , 애써 아닌 척하겠지만 당황하거나 우울해할 거다 . 여자 친구는 “ 어쨌든 지금 너와 행복하게 사귀고 있으니 그만 아니냐 ” 며 답답해할 거다 . 그녀가 꽤 너그럽다면 거짓말로라도 당신이 최고라고 기를 세워주겠지만 , 그걸로 당신 기분은 절대 안 풀린다 . 외려 허망하기만 할 테고 기색을 감추지도 못할 거다 . 애써 너그러움을 발휘한 여자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일이다 . 왜 그러냐면 판도라의 상자를 연 대가로 당신이 본 건 우월한 전 남자 친구가 아니라 , 당신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 내 우월함 ’ 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든 게 아니라 ‘ 지금 사귀고 있는 관계 ’ 로부터 오는 행복이란 걸 확인해서 허망한 거다 . 요컨대 , 정복할 대상이 없어진 기분이 된 거다 . 물론 이런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는다 . “ 관계로부터 오는 행복이 허망해 ? 정복은 무슨 찌질한 새끼 ” 란 여자 친구의 일갈이 선하게 그려지니까 .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여자들은 실망감에 화가 많이 나겠지만 , 미안하게도 아직 끝이 아니다 . 묵직한 한 방이 남아있다 .
허망해도 입을 다무는 건 결코 ‘ 여자 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 가 아니다 . 그보다는 역시 , 찌질하게 여겨지는 게 관건이다 . 욕먹고 뺨 맞는 건 대수가 아니다 . 연인으로부터 업신여겨지는 사태만을 막고 싶다 . 여자에게 촉이 있어서 간밤에 어떤 여자랑 놀아났는지 안 봐도 훤하다면 , 남자는 서열에 촉이 있다 . 중 · 고등학교 시절부터 , 어쩌면 더 어릴 때부터 길러온 기민한 감각 . 반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우열이 정해지고 업신여겨지는 그 감각 . 이걸 연인 관계까지 확대하는 건 못난 짓이라고 배우긴 했는데 ,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 따라서 ‘ 못난 짓이라고 하니까 우위에 서려고 하지는 말되 , 내가 열위에 있지는 말자 ’ 가 내 연인 관계의 규격이다 .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란 없고 찌질과 우월 사이에서 멤도니 뭇 여자들 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 아무튼 , 그래서 나는 궁금하고 궁금해도 참고 또 참으며 전 남자 친구들을 상자 속에 남겨둘 거다 . 하지만 결국 또 열고 말았다 . 왜냐하면 오늘 고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물렁물렁했던 거 같거든 . 시간도 좀 짧았던 거 같고 .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전 남자 친구 대신 전 여자 친구가 등장하고 , 양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혔을 때는 의외로 별 충격이 없었다 . ‘ 나 사실은 레즈비언이고 , 너는 그냥 생체 딜도였어 ’ 라면 큰 상처겠는데 , “ 저번에는 여자를 사귀었어 . 이번에는 남자인 너를 사귀는 거고 ” 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 감이 안 오니 차라리 안심이다 . 내친김에 질문을 이어갔다 . “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 ?” 여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는 어쩌면 나보다 부자일 수도 , 고학력일 수도 있지만 다 괜찮다 . 괜찮고 말고요 . 비교할 고추가 없으니까요 ! 만세 ! 강 건너에서 안심하고 호기심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또 내심 ‘ 양성애자라면 혹시 쓰리썸도 가능하지 않을까 ?’ 하는 되도 않는 희망도 살짝 품었지만 , 그건 입 밖으로 내면 첫 섹스 자리에서 차일 것 같아 삼켰다 . 이런저런 궁금함을 안고 , 대수롭지 않은 척 질문 던지는 연기를 시작했다 .
1 6 0 maxim May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