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언어의 놀라움을 느꼈다. 흔히 사람의 마음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 시를 읽으면서 언어로 표현된
것을 마음으로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시
를 읽을 때 그렇다. 무엇을 말하는지 온전히 알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생
소해지곤 한다. 이것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
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라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
다. 이름 부르다, 라는 명료했던 행위가 의미를 부여하다, 라는 추상적인 행위
로 바뀌면서 딱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이미지가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머리
속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또 의미를 부여한다, 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무슨 의미를 부여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의미는
뭘까? 빛깔과 향기는 어떻게 느끼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읽으
면 읽을수록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시처럼, 이 시가 읽으면 읽을수록 모호해지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
계도 알면 알 수록 모호하다. 이 사람이 정말 믿을만한 사람일까, 도움이 될만
한 사람일까를 정확하게 판단해서 곁에 두기도 하지만 때로는 손해를 보면서
도 어떤 사람을 곁에 두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는 그 사람이 객관
적으로 좋은 사람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했
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섣불리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가 있다. 어떤 사람의 빛깔과 향기를 고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부여한 의미는
오히려 내게 갈등과 고민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정말 좋아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원
하고 깊은 관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 시처럼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누군
가와 어울려 살아간다고 해서 원초적인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를 통해 일시적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그 관계
속에서 느끼는 회의감, 배신감, 아픔 등이 더 많다. 그것은 깊은 관계일수록 더
심화된다.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지고,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기를 바라
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새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살고 있는 자
신을 발견했을 때보다 견디기 힘든 순간도 없을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나를 포기하고 감정 상하면서까지 견디는 것이 옳을까? 아니다, 아닐 수 밖에
없게 우리는 행동한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정작 깊게 만나는
것은 몇 사람 되지 않는 것은 알게 모르게 타인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
리는 본능적으로 덜 상처받는 길을 택한다. 그래서 점점 혼자가 되기를 원하고
가벼운 관계를 원한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 중에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이라
는 작품은 이런 현대인들의 가벼운 관계를 비판한다. 왜 그런 관계가 비판 받아
야 하는가? 가벼운 관계가 더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시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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