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страница 4

작가의 말 이런 것도 글이라고 내놓느냐는 꾸중을 받을 각오는 돼 있다. 알량하기 짝이 없는 글 솜씨를 내 세워 보겠 다는 생각 같은 것은 당초부터도 없었으니 언감생심 칭찬 같은 것을 바라기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려서부 터 남 앞에서 입을 열기를 두려워했었다. 오죽하면 ‘뚝보’나 ‘소 죽은 귀신’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녀야 했을까. 소학교 때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이름을 불러도 ‘네’라는 대답을 하지 못해 여러 날 결석으로 처리 되기도 했고 수업 도중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면서도 단 한번도 스스로 손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속으로도 생각이나 의견 또는 판단이나 결단 같은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을까. 옳고 그르고를 떠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야 왜 없었을까 마는 겉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답답함은 스스로도 견디기가 어려운 세월 이었다. 자신감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나 더하기 하나면 둘이 된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도 고 개를 들거나 입을 열지도 못한다는 것. 그런 나 자신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은 나이 만 칠십이 넘긴 지금까지 도 이어오고 있으니 이것이 실제의 내 모습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무언가를 나타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 만년 ‘뚝보’인 나의 입을 연다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구태여 남 앞에 나 자신을 내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고 입을 열지 않고도 무언가 말을 해야 만 할 것 같은 충동 같은 것. 오해로 인한 억울함을 당할 때, 상대방의 잘못된 판단으로 엉뚱할 결과를 초래 할 때도 그렇고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된 친구를 변명으로라도 다독여주고 싶을 때도 그렇다. 말을 통해 나타낼 수 없는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경우도 그렇다. 이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글을 쓰는 것이었 던 것 같다. 이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자성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사십여 년 전 베트남에서 산화한 친구 이 치호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 클래스메이트로서 둘도 없는 친구 였다. 성격과 취미 또는 추구하는 방향도 같아 학교생활에서나 학교 밖에서도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도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