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샘터 Soonsam 2018 Spring | Page 30

간증 및 수필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고 ,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니

고등학교 땐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 특히 ,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흥미가 전혀 없었던 수학 , 과학 쪽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는 했고 , 그 뒤로는 이학계열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 모의고사 성적도 좋아서 서울에 있는 최상위권 대학에도 지원할 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 그때 당시 나를 되 돌아보면 공부도 열심히 , 기도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던 것 같다 . 하지만 수능 당일 , 일이 터졌다 . 그렇게 자신 있어 하는 수리영역 시험지를 받았는데 눈앞이 컴컴해지며 , 문제 가 읽히지 않는 것이었다 . 결국 , 마음을 진정하고 문제를 푸 는 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바람에 끝까지 다 풀 지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며칠 후 수능시험 결과가 나 왔을 때 결과는 예상대로 참담했다 . 최악의 성적이었고 , 그 간 살아온 인생 중 최악의 시간이었다 . 집안은 한숨으로 가 득했고 나는 한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원망과 자책으 로 며칠을 지샜다 .
결국 , 상황을 인정하고 내 수능 성적에 맞는 대학교 생명공 학과에 입학했다 . 대학교 1 , 2 학년 때는 방황도 많이 했고 공 부에 많이 소홀했지만 ,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부터 마음을 다 잡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 졸업을 앞둔 어느 날 , 대학 생활 4 년 가까이 대화 한마디조차 나눠보지 못한 교수님께서 나 를 부르셨다 . 교수님께서 ‘ 1 년 동안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 학교에 연구년을 가시는데 , 나이가 있기에 연구를 주도적으 로 하기 힘들어 , 본인을 도와 연구를 할 학생 한 명을 데리 고 갈 계획이며 , 그 중에 너를 생각하고 있다 .’ 라는 내용이 었다 .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부르셨을까 궁금했지만 , 미 국에 1 년 방문 연구원으로 다녀오게 되면 , 연구원 경력과 영 어 실력이라는 취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두 마리의 토끼 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 , 전후 사정 생각지 않 고 알겠다고 했다 .
아바드 3 김호신
이었다 .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던 영어와는 차원이 다른 어휘 와 속도로 영어를 하니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당연했다 . 하루에 겨우 Hello , Good bye가 영어 대화의 거의 전부였 던 처음 6개월은 답답함으로 가득했고 , 또한 한국에 계신 부 모님 , 친한 친구들과는 떨어져 있으니 외로움과 우울함은 말 할 것도 없었다 .
그래도 6개월 정도 지난 이후에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 에 자신이 생겨 주변 사람들과 조금씩 대화를 하기 시작했 고 , 연구하는 것도 점차 익숙해져서 관련 연구에 대해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다 . 특히 이 시기에 감사했던 것은 외로움 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여자친구이자 현재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1년의 방문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미국에서 했던 연구가 마음속을 맴돌았고 , 결국 회사 취업이 아닌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진학하기로 결심했 다 . 현재의 아내가 보고 싶기도 해서 무모했지만 내가 방문 연구원 동안 몸담았던 NCSU 대학원만 바라보며 진학을 준 비했다 . 석사학위 조기 졸업을 위한 연구와 학업 이외에도 미국 대학원 진학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1년 반의 시 간을 보내고 기적적으로 NCSU 재료공학과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
미국에 대한 희망과 설렘 가득한 마음은 미국에 도착한 지 1 시간도 채 안 돼 없어져 버렸다 . 언어가 전혀 안 통했었던 것
30 순례자의 샘터 www . soomsam . 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