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
우리 관계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 걸까?
‘ 이름’ 을 붙이지 않은 한 여자의 이야기. by 칼럼니스트 정소담
여자는 그 남자 J를 홍콩에서 만났다. 도망치듯 급작스레 온 홍콩이었다. 며칠간을 그저 호텔에 머물다가, 그래도 홍콩에 왔는데 주변은 돌아봐야지 싶은 생각에 찾아간 피크 타워. 홍콩의 야경이 실컷 내려다보이는 피크 타워의 꼭대기에서 여자는 남자 J를 만났다.
여자가 자신의 모습을 야경의 한 가운데 담아보려 이리저리 움직이던 셀카봉을 두고 이 해괴한 물건이 대체 무어냐며 깔깔대던 그는 독일인이었다. 여자는 첫눈에 그 남자가 좋았다. 둘은 그 날 같이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는 맥주도 마셨다. 맥주를 마시고도 헤어지지 않았다. 그 날 이후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고 또 주말이면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그렇게 몇 주가 흘러갔다.
그 날 밤 여자는 생각했다. 아무런 의문도 없이 지금껏 너무나 당연한 절차로 여겨온“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하는 선언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 돌아보니 여자는 서너 번의‘ 공식적인’ 연애를 했지만,‘ 남자친구’ 라는 같은 이름을 부여받은 이들의 존재감도 역할도 그들에 대한 마음도 모두 달랐다.‘ 오늘부터 1일’ 선언으로 공식 연인이 된 이들 중에는 실상 단 하루도 마음의 연인이었던 적이 없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J와 보낸 홍콩에서 그녀는 그와 공식적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의 연인이었고 지금껏 누구와도 그만큼 마음이 동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언제부터 1일이냐, 우리가 무슨 사이냐, 하고 정의를 내리는 일에 왜 그토록 집착했을까. 그 승인은 누구로부터 받는 거고 그 선언은 누구를 위해 필요한 거였을까.
연인이 아닌 남자와 데이트 하고 스킨십을 나누는 일이 지금껏 없던 여자였지만, 그곳이 홍콩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그에 대한 마음이 전에 없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는지 그와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여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어떤 저녁, 여자는 남자와 술을 마시다 네가 내 보이프렌드는 아니잖아, 하며 웃었고, 남자는 정색하며 아니었어? 하고 물었다. 그 말에 도리어 어리둥절해진 여자에게 남자는, 그럼 너는 나를 남자친구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런 시간을 보내온 거냐고 반문했다. 여자는 그제야 알았다. 외국에는 우리 식의‘ 오늘부터 1일 선언’ 문화가 없다는 사실을. 그‘ 문화’ 에 대해 이야기하자,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에 declaration( 선언) 이 필요한 거였냐며 남자는 웃었다. 생각해보니 그게 꼭 필요치는 않은 것 같다며 여자는 따라 웃었다.
주말 즈음이 되자, 여자는 그것이 갖는 의미를 단 한 가지도 찾을 수 없어 난감해졌다. 오히려 그 일에는 부작용만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오늘부터 1일” 선언과 함께‘ 남자친구’ 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여자는 늘 남자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 남자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리러 와주길, 만남 후에는 언제나 집에 데려다주길, 자기 전에 전화해주길, 내일 아침 일이 있어도 늦게까지 이야기 나눠주길 기대했었다. 남자친구라는 이름이 붙은 존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남자친구라는 이름은 붙어있었지만, 실상 사귀는 중 단 하루도 뜨겁지 않았던 관계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마음이 뜨겁지 않았음에도 그에 대한 여자의 기대는 같았다. 그건 그에게 바란 것이 아니라 그냥‘ 남자친구’ 라는 타이틀이 부여된 모든 이에게 여자가 기계적으로 바라는 것들이었으니까.
1 4 8 maxim July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