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Magazine MAXIM_2017_04_new | Page 77

“ 장대한 기암바위도 명산 정상에 놓이면 절경이나, 우리집 앞마당에 두면 거대한 흉물이다.
‘ 그냥 좋은 사람’ 을 찾는 건 정답이 아니다.”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언니 쪽에서 나에게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보름쯤 지났을 때 언니로부터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읽기 전부터 이렇게 긴 문자는 참으로 오랜만에 받아본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은 분량의 메시지는 이후로도 12개가 더 왔다. 시작은“ 네 눈에 내가 그렇게 별로인 여자였니?” 였다. 너 내가 노처녀라고 무시하니, 아무리 내가 남자 조건 안 따진다고 했지만 나한테 진짜로 평범한 샐러리맨을 소개해주다니 너무 심한 거 아니니, 나 국산차 타는 남자 한 번도 안 만나본 거 알지 않니, 우리 관계가 이거밖에 안 됐니, 너 혹시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었니, 고의가 아니고서는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등등.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유서에 니 이름 쓰고 죽을 거다” 라는 문장이 나올까 두려울 지경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그 언니의 조건과 비교했을 때 크게 하자 있는 남자를 소개해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언니가 자기 눈 낮은 거 알지 않느냐며 조건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기에, 인품이나 성격 위주로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줬을 뿐이다.
국산차 타는 남자는 못 만난다고, 연봉은 이 정도 이상 되어야 하며, 어떤 직업군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자신이 바라는 게 있으면 제발 처음부터 솔직히 털어놓자. 엄마의 마음으로 너에게 과분한 사람을 선뜻 소개해줄 주선자는 세상에 없다. 알아서 해주길 바라지 말고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그냥 소개팅을 부탁할 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하라. 그래야 나중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다. 주선자에게 속물로 보일까 두렵다면 처음부터 결혼 정보업체를 찾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예쁜 여자 소개해달랬지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남자들도 여자 재력을 보는 세상이라지만, 남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첫 번째 요구 사항은 여전히 한결같다.“ 예뻤으면 좋겠어.”
몇 년 전, 학교 선배 M은 자신의 취업과 동시에 내게 연락해 소개팅을 부탁했다. 대기업에 취업했으니 이제 진짜 예쁜 여자를 소개해달란다. 그래서 예쁜 친구를 소개해줬더니, 한 번 만나고 나서는 다시 연락이 왔다.“ 나쁘지 않긴 한데... 대기업에 취직도 했으니까 원래의 내 수준에서는 만날 수 없는 여신급 여자를 만나고 싶어. 진짜 누가 봐도 예쁜 그런 여자 소개해주면 안 돼?” 응, 안 돼.
재능이 참 많은 사람이었는데, 수많은 재능 중 소주, 맥주, 사이다를 섞어 밀키스를 제조하는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눈 감고 마시면 그게 밀키스인지 소맥인지 누구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튼 오빠는 그 자리에서도 밀키스주를 열심히 제조했고, 진숙이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오빠의 재능을 칭찬하며 자리는 무르익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진숙이는 연애 경험이 없는 아이였기에 그 광경을 보고 적잖이 놀랐지만, 안 보는 척하면서 슬쩍 봤더니 그녀도 키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나의 도량으로 이 각박한 세상에 또 한 커플이 탄생했구나 흐뭇해하며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진숙이랑 연락이 되지 않았다. 소맥을 밀키스처럼 마신 그녀는 술에서 깬 뒤 그 전날 일을 떠올리고는 수치심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 오빠에 대한 호감도 없었는데 그날의 스킨십은 취해서 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이후로 여러 차례 진숙이에게 연락해봤지만 그녀는 내 연락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키스는 둘이 하고 친구는 내가 잃은 것이다. 뜨거운 키스로 가슴이 활활 타오른 밀키스 오빠는 이후에도 술만 마시면 나에게 연락해 진숙이를 찾았다.“ 오빠, 이러지 마. 나도 진숙이랑 연락 안 돼...”
헤어졌으니까 책임져 누군가를 소개로 만났다가 헤어진 이들 중에는 주선자에게 이별 후 A / S 책임까지 맡겨두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너의 소개로 만났고 그리하여 이별했으니 이 고통에는 너의 책임도 있다는 듯 구는 그런 이들. 그들은 이별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선자를 소환해 자신의 심적 고통을 부르짖는다. 물론 주선자가 자신의 이전 연인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 만남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니, 헤어지고 나서 주선자를 찾는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제발 이별 후 상담받을 권리를 미리 맡겨둔 것처럼 굴지는 말자.“ 미선이는 잘 지낸대...?” 새벽마다 묻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내 한 몸 바쳐 오작교 노릇을 해주었으면 그 이후의 모든 풍파는 오로지 당신 몫이다. 둘이 좋을 때는 쌍으로 연락도 없더니 오작교에 술병 들고 찾아와 밤마다 난동을 피우는 건 무슨 경우인가. 심지어 헤어진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아 또 소개팅해주면 안 되느냐는 놈도 있다. 양심이 없어서 헤어진 건 아니고?
예쁜 여자에게도 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자주 망각하는 것 같다. 자기 수준에서 만나기 어려울 만큼 예쁜 여자가 굳이 자신을 만나고 싶을 리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조차 잊곤 하는 것 같다.“ 2인분 같은 1인분 주세요” 수준의 얼척없는 주문일랑 주선자에게 하지를 말자. 소개팅을 앞두고 떠올려야 하는 속담은“ 이왕이면 다홍치마” 가 아니라“ 짚신도 짝이 있다” 가 되어야 한다.
키스가 부른 절교 한번은 소개팅 때문에 친구를 잃은 적도 있다. 몇 년 전, 모태솔로인 중학교 동창 진숙이( 가명) 에게 친한 오빠를 소개해줬다. 내 생일을 구실로 술자리를 만들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둘을 불러냈다. 진숙이에게 소개해준 그 오빠는
누군가에게 소개를 청하기 전에는 가장 먼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좋은 사람 소개해달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이 시를 떠올린다. 안도현 시인이 말하길,“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리하여 너에게 묻는다. 좋은 사람 소개해달라고 하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좋은 사람이었느냐. 만일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앞으로는 좋은 사람 소개해달라는 말 대신“ 그냥 딱 나 같은 사람 소개해줘” 라고 이야기하자. 어차피 주선자가 당신에게 소개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과 비슷한 사람뿐이다. 좋은 사람은 결국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다. 당신과 꼭 같은 사람을 소개해준다는 말에 화가 날 것 같다면, 지금 당신에게 당장 필요한 건 연인이 아니라 양심이다. 그러니 다시는 애꿎은 주선자를 괴롭히지 말지어다.
April 2017 maxim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