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moBiz Beauty Store May 2019 | Page 13

편집인 칼럼 역사공부가 주는 즐거움 당 대 동양 최대규모였던 미륵사지 석탑이 20여 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다시 세상에 소개되었다. 백제 말기 무왕 때인 639년에 세워진 석탑이다. 서기 639년이면 백제의 무왕이 재위한 지 39년이 되는 해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삼국이 통일되기 21년 전이다. 두 개였던 미륵사지 석탑은 1380년의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또 하나는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필자는 어린 시절 미륵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란 덕에 그렇게 반쯤 무너지고 풀이 무성한 미륵사지를 놀이터 삼아 놀았던 추억과 애정이 있다. 그런데도 미륵사지 석탑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었고 당대 동양 최대규모였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경주 불국사와 신라의 화려한 역사를 주로 가르쳐 주어 백제는 신라와 비교할 수도 없이 초라한 나라로만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아 부여와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편집인 장현석 20년 전, 미륵사지 석탑 복원을 시작한다는 뉴스를 접한 뒤에야 내가 뛰어놀던 바로 그곳이 백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백제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백제가 백 개의 포구를 가진 나라라는 의미로 백제라 불렀고, 열 개의 포구밖에 없던 시절에는 십제라 불렸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백제가 한때 중국의 몇 개 지역을 지배했다는 역사적 자료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의 사신을 그려놓은 그림과 소개 글에도 이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주서의 백제전에는 백제의 국경이 바다 건너까지 미친다고 쓰여있다. 중국의 여러 역사책 중에서도 남사의 백제전에는 “진나라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가 요서와 진평 두 군데의 땅을 점거해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물론 중국 학자뿐 아니라 일본 학자들은 확인 안 된 허구라고 주장하지만 상당한 근거가 실제 존재하고 있다. 백제는 배가 드나들기 쉬운 서해에 있어 해상무역이 활발했다. 특히 인천과 개성, 영암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의 중간에 위치해 일찍부터 국제무역 중심지로 번성했다. 내륙은 주로 평야로 곡식과 가축이 잘 자라 생활이 풍족했을 법하다. 삼국사기에도 백제는 삼한 시대부터 수로시설을 갖추고 농사 를 지어 융 성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특히나 미륵사지가 위치한 전북 익산 주변 지역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발견된 것만 보아도 얼마나 풍요롭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좋은 자연조건 때문에 백제는 영토가 몇 배나 더 큰 고구려보다 화려한 문화를 즐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륵사지 석탑은 그렇게 번성했던 백제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백제 멸망의 추억도 담고 있다. 미륵사지에서 가까운 곳에는 왕궁리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 있다. 어린 시절 같은 반 친구 중에 왕궁리에 사는 아이들이 있어 몇 차례 놀러 갔던 작은 농촌 마을이다. 논과 밭뿐이었던 그곳이 백제 왕궁이 위치했던 곳이라서 마을 이름이 왕궁리였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최근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읽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백제의 위대한 역사는 그렇게 흙 속에 감추어져 있었고 왕궁터는 논과 밭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무너져 버려진 미륵사지 석탑의 무거운 돌은 언제부터인가 어느 집 대들보 받침돌로 둔갑하여 쓰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자기 집 대들보 밑의 돌덩어리가 국보급 미륵사지 석탑 일부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을까? 다음 한국 방문 때는 꼭 미륵사지를 다시 한번 찾아가 보려 한다. 그곳에서 가까운 왕궁리도 가보고 싶다. 백제의 위용을 이번에는 올바른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