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THE LINES ISSUE 10 'YOU' | Page 72

기억 임세빈 언젠가 네가 나를 떠나게 된다면, 그건 너와 내가 어른이 되고 추억을 쌓는 게 아니라 꺼내볼 때쯤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다른 무언가가 생겨 네게 텁텁한 기분으로 ‘안녕.’하고 인사한 다음 보내 줄 거라고, 그 때쯤의 너는 네 죽음을 슬퍼해 줄 직장 동료들과 어쩌면 너를 눈여겨봤던 교수가 한 명쯤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당연한 듯이 했던 적이 있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 때는 당연히 몰랐다. 그게 이토록 덧없는 상상이었을 줄은. 애석하게도 너와 나는 어른이 아니었고 나에겐 아직 지켜야할 무언가가 너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너에겐 직장 동 료나 교수가 아닌 학교 친구들과 선생들이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거창하고 복잡해서 영화의 한 장면같았다면 괜찮 았을 거다. 그렇게 라면 이해할 수 있다고, 널 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너는 덜 핀 꽃이었고 타오 르지 못한 불꽃이었으며 아직 결말을 내지 못한 책이었다. 너는 마당에 피어있던 꽃이 지듯, 자연스럽고 조용히 나를 떠 났다. 소설 속에 흔히 나오는 병약한 여동생 역할로. 나는 그런 결말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건 내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집에 가면 네가 인사하는 모습이 환상이 되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공허함에 눈물을 쏟지도 널 원망하지도 않았다. 너는 없었고 집은 차가웠다. 그 뿐이었다. 네가 수학여행을 갔을 때처럼 나 홀로 집을 지킬 뿐이 었다. 단지 그 기간이 좀 길어졌을 뿐. 배는 고프지 않았다. 오랜만에 네 방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들어오지 않았던 곳. 네 방에서는 희미한 향초 냄새가 났다. 창문을 열까, 하다가 관뒀다. 네 방에 있는 게 뭐든,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네 방에 놓아둔 영정 사진을 보면서 새삼 네가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걸 느꼈다. 늘 봐왔던 얼굴이라 전에는 잘 느 끼지 못했는데, 사진 속에서 미소를 보내는 너는 확실히 예뻤다. 정직하게 검고 긴 머리. 조명을 받은 얼굴에서 눈이 반짝 였다. 네 방은 따로 정리 할 게 없어서, 그대로 놔두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리저리 어지럽혀져 있었을 텐데. 주인을 잃은 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 없는 슬픔이 조용히 흘렀다. 학교에 가자 모두가 날 쳐다봤다. 말을 걸어도 될까, 고민하는 눈빛, 쟤가 걔야? 동생 죽었다는…. 이라고 속삭이는 듯한 눈빛, 멀쩡해 보이네. 라고 말하는 무심한 눈빛. 수십 개의 눈동자가 다른 의도로 내게 다가왔고 동시에 멀어졌다. 선생님조차 애도를 표하셨다. 그게 진심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오랜만에 먹는 급식은 어쩐지 훨씬 맛이 없다. 네가 좋아 했던 반찬이 나온 것도 아닌데 괜히 네 생각이 났다. 입맛이 없다. 네가 해준 밥이 그리워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 면 네가 좋아하던 녹차 아이스크림이나 잡채, 새우볶음밥, 크림파스타 같은 것 좀 많이 먹여 놓을 걸 그랬다. 네가 쓰던 병실에 왔다.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해서 이기도 하고, 내가 와보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오늘이 마지막 방 문이 될 테니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전에 정리해 둔 가방이 먼저 눈에 띄었다. 담갈색 가죽 가방은 벽 한 쪽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침대 는 하얀 시트가 단정하게 깔려있었다. 그 위에 남은 온기는 없었다. 주름 없이 매끈한 천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자 부드 러운 마찰음이 났다. 침대 옆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다. 의자를 꺼내 앉았다. 딱딱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탁자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