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83

이들의 성이 찰 만큼 흡족하지가 않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봉투 대신에 사과상자가 사용되더니 이제는 굴비상자가 등장하게 되었나 보다. 운반 수단으로는 지프차도 사용되더니 앞으로는 덤프트럭이 동원돼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더러는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 고관대작의 이름 석 자를 빌리는 것도 한 방편이 되겠지. 아마 이런 것들을 두고 '바람'이라고 하는 걸까. 이러한 지름길을 통과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의 지불이 있어야 하겠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런 식의 삶이 얼마나 편한 세상살이의 방법인가.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도 꽤나 많을 것 같다. 나도 한번쯤은 이런 식의 '바람의 힘' 앞에 다가설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특별한 하자도 없이 앞과 뒤 그리고 양 옆까지 꽁꽁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마지막 열쇠를 구하고 싶었던 그런 심정이었을 게다. 그러나 책상 아래로 건네질 대가에 대한 지불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하늘만 바라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만 격이었겠지. 최소한 그때 나에게 그런 정도의 지불능력만 있었더라면 오늘의 내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지난해에는 이곳 캘리포니아의 주 예산 삭감으로 인하여 20 여 년 간 이어오던 UCLA 의 한국음악과가 폐과(廢科)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 학과를 계속 유지해 나가자면 년 5 만 달러라던가 10 만 달러 정도의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내용이 거의 매일같이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계 언론에서 보도되기도 했었다. 모금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많은 교민들이 참여하여 기부금을 모으기도 했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캠페인에 적극 참여를 하지도 못한 내 주제에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람 타기’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바로 그분이었다. 서부 사립명문 대학에 거액을 쾌척 하기도 했던 그런 분이라면 한 번의 멋진 선심(?)만으로도 이 정도의 문제는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 대학에 기부한 금액의 십 분의 일이나 이십 분의 일만으로도 UCLA 의 한국음악과는 살아남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그런 미담은 소개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나의 이러한 개인적인 기대감은 부질없고 당치도 않은 한낮의 꿈에 불과한 것이었을 게다. 그분의 개인적인 판단과 계획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기도 하다. 단지 내 생각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 분이 이제까지 행한 크고 작은 공익사업이나 사립명문 같은 데에 거금을 투척해 온 것이 그 ‘바람 타기’ 작전의 일환에서가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분이 기부한 금액으로 그 사학에 무슨 연구소 같은 기관이 설립이 된다면 기부자의 이름이 새겨지게 될 것이고 공익사업에서도 공로자라는 이름의 기록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단지 이런 걸 목적으로 할 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람, 바람을 타서 운이 트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로 인해 신세를 망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오기도 했다. 그런 걸 타지 않고도 자기의 길을 자기 자신의 순수한 노력과 정성으로 일구어 나갈 수는 없을까. 피와 땀의 대가 없이 거둔 소득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바람 같은 것을 탈 만한 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바람을 타기 위한 대가의 지불능력이 없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여러 날 동안,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멈추어진 이날, 산소의 함량이 가장 많은 시간대를 골라 뒤뜰에나 나가봐야겠다. 잔디밭 위를 걸으며 청결하고 시원한 바람이나 쏘여야겠다. 대가의 지불 없이도 탈수 있는 바람이 있는 뒷마당에서. 작으나마 자기가 원할 때 이렇게 청결하고 상쾌한 바람이라도 쏘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나에게 부여된 조그만 행복이고 축복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