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68

LA 공항에서의 한국군 병사들 1980 년대 초의 1-2 월쯤으로 기억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던 오후였다. 이날도 한국에서 방문해 오는 거래처의 손님을 모시기 위해 시간을 맞추어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나갔었다. 이날 따라 비행기의 도착 시간이 두 시간 이상이나 지연된다고 했다. 일단 사무실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나오자니 거리나 시간상 사무실에 가자마자 다시 나와야 할 형편이었다. 하릴없이 공항 내외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한참을 서성이다 보니 호텔이나 렌터카 회사의 광고 안내판 이 있는 곳에 서너 명의 군인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착용하고 있는 유니폼으로 보아 한국군들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렌터카 회사나 호텔에 연결되어있는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자기네들끼리 무언가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았고 초조해 하는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역시 한국 육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한 명은 육군의 중사이고 나머지 세 명은 하사 계급장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한국에서 오셨군요. 뭐 도와 드릴 일 이라도 있는지요?” 라고 물었다. “아녜요, 호텔을 잡으려고 전화를 해도 자꾸 끊어 버리네요.”란다. 내 생각에 호텔 측에서 전화를 자꾸 끊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분들의 서툰 영어로 인하여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 도착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분들을 도울 량으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항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다. 켄터키의 루이빌에 있는 모 부대에 몇 개월 간 연수를 가는 길이라고 했다. LA 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 루이빌로 가는 첫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항과 연결돼있는 여러 곳의 호텔에 전화를 하여 그분들이 필요로 하는 내용에 알맞은 호텔을 찾기 시작하였다. 즉 공항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저렴하고, 무료로 공항에서 호텔까지 데려다 주고 다음날 새벽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공항까지 태워다 줄 수 있는 곳을 찾아주기는 일이었다. 새벽에 일찍 깨워주고(Wake-up Call) 아침 식사 제공 여부와 공항까지 태워다 주는 것과 이분들을 공항까지 데리러 오도록 조치를 해놓았다. 호텔에서 보내는 밴을 기다리는 동안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말을 걸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간단한 답으로 “네”, “아니요”, “글쎄요” 정도의 답이 고작 이었다. 기껏해야 “LA 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죠.”라든가 “이곳과 한국의 시간차는 어느 정도냐” 정도의 말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려 들지 않았다. 무언가 경계를 하고 있는 눈치들이었다. 이때 문뜩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이곳에 이민을 오던 1970 년대에는 해외에 나가려면 필수적으로 소양교육을 받아야 했었다. 이때 해외의 도착지에서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며 접근해 오는 사람은 경계를 해야 하며 특히 한국인은 더더욱 조심하라던 말이 생각이 났다. 여행객의 짐을 노리는 날치기 일수도 있고 북한의 공작원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국군 제복을 입은 군인으로서 언행 하나하나를 조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날치기나 북한공작원의 끄나풀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먹은 대로 호텔에서 보낸다는 밴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밴이 도착하여 차에 오를 때까지는 그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호텔의 밴이 오자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차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을 할 때에야 비로소 어색한 웃음을 띠며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남겼다. 그들의 얼굴에서 긴장과 경계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 같기도 했었다. 자동차의 문은 닫혀 지고 차체는 움직이기 시작을 했다. 만리타향에서 만난 같은 형제끼리 이런 모습으로 마주 대했어야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삼십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속 한구석에 묘한 여운 같은 것이 남아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쯤 그들의 자녀를 모아 놓고 북한 공작원으로부터의 탈출 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며 아찔했던 순간을 재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