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03

제 5 부 어머님과 씨암탉 무능한 판사 어떤 모임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남자들끼리 모여 앉은 자리에서는 항상 본국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빠져서는 안 될 수순이기나 한 것처럼 이날도 본국의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야깃거리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날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던 법관의 비리로 인하여 판사가 구속된 일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검사가 판사보다 더 악랄하다 라던가 최종 판결(선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판사가 돈은 더 많이 먹게 될 것이라는 등 각자의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대화 중에 어떤 사람의 한마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판사라는 자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없거나 병신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판사로서의 자질’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라도 하는 듯 단호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마치 내가 집중포격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판사였던 것도 아니고 그런 비리를 저지른 당사자도 아닌 내가 뜨끔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오십 여 년 가까이 법관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셨던 아버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무능력자. 병신. 그의 말대로라면 바로 우리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가난하게, 그것도 형편없이 가난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버지야말로 나라의 충복이었을는지는 모르나 자식의 학비마저도 감당하지 못했을 만큼 무능한 가장이요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런 아버지를 원망도 했고 가끔은 반항 심리로 의도적인 이탈을 꾀하기도 하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콩나물을 길러 이웃에게 팔거나 바느질품을 팔게 하는 것을 비롯 땔감을 구하기 위해 이십여리 길의 내장산 밑 강변에 가서 갈대를 걷어오게 했던 한 집안의 가장이었으니. 머리맡에 떠다 놓은 자리끼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꽁꽁 얼어붙는 손바닥만한 판자 집에는 여덟 식구가 살고 있었다. 젖은 손으로 쇠로 된 문고리를 잡으면 문고리에 손이 쩍쩍 들어붙는 추위 정도는 참을 수 가 있었다. 십 리 길이 넘는 태장의 군인 촌에 덜덜 떨며 목판들 메고 “찹쌀 떠~억”하며 소리치던 일도 지금은 추억거리로만 남아있다. 요즘에 와서는 좀 살게 됐다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건강식품이라고 하여 있는 자들이나 찾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던 꽁보리밥에 묵은 김치 하나만 있어도 밥투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입학금을 내지 못해 입학을 하고도 한 달 이상씩이나 결석 처리가 된 것은 중학교 때도 그랬고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그나마 어머님이 학교에 찾아가 간청을 하여 입학금을 내지 못한 상황에서도 수업에는 들어갈 수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내야 할 납부금이 두세 달씩 밀리는 것은 예사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이어졌다. 선생님이 “너 이 녀석, 판사 아들이 납부금을 받아다 못된 곳에 써버린 거지?” 라며 자 막대기로 손바닥을 때리며 수업 중에도 집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오거나 사유서를 받아오라고 쫓겨날 때는 다른 아이들 보기에도 창피했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었다. 그 당시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의 적십자사 같은 구호단체에서 보내온 구호물자가 학교에까지 전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분유도 있었고 연필이나 지우개 또는 노트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물건들은 고아원 아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나누어주기도 했었다. 나는 능력도 없는 부모를 둔 덕택에 그런 혜택마저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나도 고아였다면 최소한 이런 정도의 혜택은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게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