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아이였으면 좋을 뻔 했다
집안에 여자라고는 마누라 하나밖에 없던 차에 한국에서 귀한 손님 하나가
왔다. 깜찍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열여섯 살짜리 여자아이였다. 수줍은 미소가
아름다웠다. 묻는 말에도 ‘네’나 ‘아뇨’ 라는 말 말고는 토를 다는 법이 없었다.
품 안에 안아주고 싶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니 본색이 들어났다. 나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려고 한다.
백발이
다된
나보다도
세상물정에
대하여는
훨씬
앞서가고
있는
것
같았다.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사람을 제 입맛대로 맞추어 요리도
하고 이용해 먹을 줄도 아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까질 대로 까져
있는 그 아이를 바라다보기가 징그럽다.
눈이 마주 치는 것도 무섭다. ‘서울깍쟁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골의
아이들은 물론 벽촌의 어린아이들까지도 우리 때처럼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혀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어수룩하고 멍청해 보이는 듯한 아이가
좋다. 더 사랑스러울 것만 같다 멍청하리만치 어수룩하고 순해빠진 그런 아이가
좋다. 그런 아이에게 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가 않을 것
같다. 간이라도 떼어 주고 싶을 것만 같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에게 라면
손해가 나더라도 아까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