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엄마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 [박영보 수필3집] | Page 8

겨울 비 추위를 잘 타는 편인 나는 기온이 내려가게 되면 몸도 마음도 움츠려진다. 화씨 백도가 넘나드는 캘리포니 아의 여름 날씨에 웬만한 더위 정도는 참는데 큰 어려움이 없으나 수은주가 내려가면 활기마저 떨어진다. 그 런데도 겨울이 기다려지는 데에는 무슨 이유 같은 것이 있을 법하다. 그렇다고 유독 겨울만이 기다려진다는 것은 아니다. 일년 사계절 중에는 계절마다의 특성이 있고 그때마다의 좋아할만한 점도 없지 않겠지만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데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서일까. 우선 떠오르는 것이 눈이라 하겠다. 온 세상을 하얀 옥양목 이불로 덮어놓은 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게 만 들어 준다. 눈밭에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발자국을 남기는 상쾌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곳 남 가주에 서 그런 느낌을 체험하자면 적어도 몇 십 마일 밖을 나가야만 된다. 그렇지만 앞마당에 나가게 되면 집 가까 이에 있는 엔젤레스 마운틴 꼭대기에 하얗게 덮인 눈이 보이고 더 멀리에는 빅 베어 산정의 설경도 바라다 보 인다. 평지에 비가 내릴 때 기온이 화씨 삼십도 밑으로 내려가는 해발 삼천 피트 이상이 되는 산에는 눈이 내 린다. 평지에서 눈을 만져보거나 직접 밟아볼 수는 없더라도 바라다볼 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 아닌가. 한 겨울, 같은 시간대에 집에서 한두 시간만 가면 동쪽에서는 스키를 즐길 수 있고 서쪽으로 가면 태평양 연 안 산타 모니카 비치에서 수영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몇 년 전만해도 겨울의 주말이면 마운틴 하이나 빅베어 산을 찾는 횟수가 많았었다. 우리 네 식구 모두가 스키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같은 캘리포니아지만 맴모스 마운틴이나 레익 타호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여덟 시간 정도를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일년에 몇차례씩은 다녀오기도 할 만큼 스키에 재 미를 붙이고 있었다.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눈이나 스키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 비. 몸과 마음을 적셔주고 있다. 메말라있던 잔디밭이 빗물에 적셔지면 초록의 색깔이 더욱 짙어진다. 이곳에서의 우기라면 십일월 말에서 이듬해 이 월경 까지로 봐야 한다. 비를 맞으면서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보게 된다. 삶의 방식이랄까, 자연의 법칙 같은 것, 아니면 주변의 환경과 여건들 속에서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어떤 절차와 방법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지나쳐 보낸 시간들보다 남아있는 시간이 훨씬 짧은 이 시점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시간과 공간을 무엇 으로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까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 보면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꼭 겨울 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가 내리면 어쨌던 기분은 좋아진다. 가랑비면 어떻고 소 낙비면 어떠랴. 우산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도 웬만한 빗발에는 펴지도 않는다. 삶을 살아가며 가뭄 속에 메말 라 있던 가슴을 적셔주는 비는 나를 보듬어 주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동안 말라 비틀어져갈 것 같던 나의 가슴을 적셔주는 비. 귀 바퀴 언저리를 흘러내리는 작은 빗방울은 아직도 겨울잠에 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불러일으켜 세우려는 귓속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