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샘터 Soonsam 2018 Spring | Page 39

교사로 우리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토마스 ( 1866 ), 알렌 ( 1884 ),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 1885 ) 선교사 보다도 앞선 1832년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한 인물입니다 . 그러나 한국 개신교 선교 원년의 기점을 , 알렌 선교사 또는 언더우 드 , 아펜젤러 선교사 혹은 그 이후 ( 1879 ) 한인 개종자들에 의한 자생적 기독교 공동체의 시작을 기반으로 하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 귀츨라프 선교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
1832년 애머스트 호를 타고 동아시아를 순회하면서 , 조선을 방문했던 이 사건에 대하여 , “ 비공식 선교 ” 라는 평가와 그가 실제적으로 조선에 머물렀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 약 한 달 ), 그의 활동을 정식 선교가 아닌 정탐 , 탐방수준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 한편 , 그를 선교사라기 보다는 , 단순히 통 상선의 통역관 , 선의 ( 의료 ) 역할로 한정해 보는 시각도 존재 합니다 . 불충분한 자료와 연구의 제한성 때문 일수도 있겠으 나 , 그럼에도 그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초기 선교에 공 헌한 부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
귀츨라플는 선교 정보의 중요성과 전략적 모델을 제시합니 다 . 그의 조선 선교는 즉흥적이거나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선교였습니다 . 그가 조선을 방문 후에 기록한 ‘ 동아시아 항해기 ’ 에 따르면 , 그는 이미 조선의 역사 적 , 문화적 , 종교적 , 지리적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특히 , 이전의 중국 선교를 통해 , 조선과 중국과
의 외교적 관계를 역사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 이전 에 하멜 일행이 한반도에 표류한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조선에 대하여 방대한 사전 정보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 그는 조선 정부에 의해 자행된 카톨릭 박해와 천주교인 의 순교 , 쇄국 정책을 모를리 없었습니다 . 조선에서의 선교 사역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
귀츨라프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실제적인 선교 준비를 합 니다 . 그는 모든 사전 연구를 통해 조선의 수도에 유럽인이 한 명도 없다는 것과 기독교 ( 개신교 ) 라는 이름이 민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 그는 중국어 ( 한문 ) 로 된 다량의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전도책자들과 의료선교를 위한 의약품 까지도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 이러한 선 교지에 대한 사전 이해와 그에 따른 선교 전략적 준비는 그 의 성장기와 학창 시절 그리고 선교사 훈련 시절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 당시 독일의 경건주의 중 하나인 헤른후트 ( Herrnhut )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귀츨라프는 한국뿐 아니라 , 중국 , 일본 등 동아시아 나라들 을 포함한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 1831-1833 ) 하게 됩니 다 . 사실 , 1차 중국 선교 여행은 그의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 음 직후 이루어졌는데 ,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어려움 조차도 기쁨과 열정으로 이겨 내었다고 고백합니다 . 그의 이러한 초 기 선교사역들을 통해 , 1843년 20만명의 개신교인이 중국에 존재하게 되는 기여를 하게 되는 한편 , 한국의 복음화를 위 한 전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
1832년 7월 17일 애머스트 호의 최초 정박지인 ‘ 장산 ’, 지금의 황해도 몽금포 해안을 거쳐 , 뱃길을 따라 남하하 여 통상을 기다리며 ‘ 고대도 ’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재 ) 에 정박하게 됩니다 . 그는 고대도에 머무는 동안 , 그다 지 호의적이지 않은 조선인들의 반응에도 친근하게 다 가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를 자주 가졌으며 , 그가 가져온 성경과 전도 자료 등을 배부함으 로 그가 미처 닿지 못하는 조선 땅에 복음이 확산되고 전해지기를 소망하였습니다 . 특별히 , 그는 당시 국왕 ( 순 조 ) 에게 진상할 선물 목록에 , 로버트 모리슨과 밀른 선 교사가 번역한 중국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인 , www . fkbc . 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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