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철없는 남편, 너그러운 아내
이
번 주가 결혼 25주년이다. 성격이 딱 반대라서 서로의 생각이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부가 2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살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항상 옆에 있어 존재
자체까지 잊고 살게 되는 게 부부 같은데 칼럼을 쓰려고 컴퓨터 키보드에 손을 얹고서야 아내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내는 한국의 어느 명문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한국에서는 제법 잘 알려진 광고회사 마케팅
전문가로 근무했다. 공부를 좋아해서였을까? 조지워싱턴대학에서 MBA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왔다가 필자를 만났다. 역사에 ‘만일'이라는 가정은 없다지만, 아내가 나를 만나지 않고 유학생활을
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더라면 분명 화려한 직장생활과 성공한 남편을 만나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쫓아다니던 남자 중 국회의원, 사업가, 대기업 임원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런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혼생활 25년 동안 필자는 설거지와 빨래, 힘쓰는 모든 일을 자처해서
하고 있다. 다른 남편들도 다 하는 일인데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편집인 장현석
아내는 신혼 때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든 아태평화재단 워싱턴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청와대 비서실 혹은 서기관급 공직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어린 아들을 위해
황금 같은 기회를 잡지 않았다. 필자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부담스러워 다니던 방송사를
떠나게 되었고 아무런 경험도 없는 뷰티 서플라이를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까지만큼은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평탄한 인생 코스를 살았던 철없고 순진한 젊은 부부라서 그랬던 것 같다.
결혼 25주년이 된 오늘까지 아내에게 단 한 번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늘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아내는 돈이나 물질에 조금의 욕심도 내지 않는다. 부유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자동차도 한번 사면
더는 굴러가지 않을 때까지 타고, 옷도 1년에 겨우 한두 벌 정도 사는 검소한 사람이다. 남편에게는
결혼반지 이외에는 변변한 선물한 번 받지 못했으면서도 사회사업한답시고 노후자금까지 가져다 쓰는
철없는 남편의 가장 큰 후견인이고 응원가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결혼할 때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만들어 주면서 필자는 아내에게 약속했다. “은혼식 때 더 큰 것으로
바꿔 줄게." 중동상인들의 공격적인 확장과 인터넷 판매, 중국공장 직판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오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뷰티 서플라이 업계가 협동조합으로 뭉쳐야 한다고 떠들어 대면서 몇 년째 돈
버는 일을 포기하고 오히려 집에서 돈을 가져다 다 써버린 덕에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
약속만큼은 꼭 지키고 싶었는데 매우 아쉽다.
부부가 인연을 맺으면 50년 정도는 함께 사는 것 같다. 지금까지가 절반이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아내를 대하고 싶다. 공익사업이나 사회사업에는 관심을 조금 줄이고 개인사업에 좀 더
치중하는 실속있는 남편, 생일 때는 타고 다니는 고물차도 바꿔줄 수 있는 여유로운 남편, 보석 가게에
가서 “아무거나 한번 골라봐"라고 허풍이라도 떨 수 있는 남편으로 살아야겠다.
소매점들의 권리를 지켜주겠답시고 펜을 들었다가 에빈 뉴욕처럼 허접한 회사로부터 말도 안 되는
고소나 당하는 쓸데없는 “짓”은 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쓸데없는 곳에 변호사비 낭비하느니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왜 인제야 알게 되었는지 가슴만 미어진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사업은 불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왜 이리도 늦게 깨달았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뷰티 서플라이 산업을 위해 나보다 더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친구가 있다. 며칠 전에 부인과 심하게
다투었다며 “집사람이 나를 원망합디다. 주위 사람들이 당신 남편 미친 것 같다고 말하더라"며 뷰티
서플라이를 위한 사회사업에 피로감을 호소해 왔다. 친구에게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부인에게는 더 큰 죄책감이 몰려온다. 친구의 부인을 위해서도 그렇고, 아내를 위해서라도 더는
사회사업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될것 같다. 아내의 응원과 너그러움을 더는 악용하지 않는 돈에 충실한
남편으로 살아야겠다. “25년간 철없는 남편을 응원해 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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