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The Lines Issue 09 SPARK | Page 22

불꽃 백창인 | 단편소설 얼굴에 물만 묻히고 방으로 와 불을 켠다. 집을 나갈 때 있 던 나의 것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정지된 화면에서 움 직이는 것은 나뿐이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목도리를 푼다. 스웨터를 벗고 꽉 기는 검정 진 바지도 벗는다. 시원하다. 속옷만 입은 채로 방 안을 생각 없이 배회하다 잠옷을 입고 밤 열두 시. 차갑고 어두운 공기를 데리고 잿빛 대문을 연다. 적 당한 온기가 나를 감싸며 반긴다. 나는 독한 냄새를 맡는다. 거 실에서 타고 있는 양초가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때문 이다. 불이 모두 꺼져 있어 깜깜한 복도를 걷자 양초가 작지만 환한 빛을 내고 있다. 노란빛이다. 엄마는 양초를 켜 놓은 채로 잠이 들었다. 아담한 유리병 안에 짙은 녹색 파라핀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위에 조그만 나무심지 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양이다.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반쯤 타 고 나면 흉측하게 변하는 게 이 양초다. 유리병 둘레로 타다 남 은 파라핀 자국들이 더덕더덕 붙고, 심지 밑으로는 촛농이 녹아 서 유리병 안에 흥건하게 강을 만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색깔도 짙은 녹색이라 흡사 아마존에 있을 법한 늪지대를 떠올리게 한 다. 보이는 것 위에 냄새가 한술 더 뜬다. 엄마는 탈취를 위해 쓴 다지만 겨를 똥으로 덮는 격이다. 낮에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공기 중으로 무거운 냄새 분자들이 밑으로 가라앉아 겹겹이 쌓 이는 듯하다. 냄새는 흐르고 흘러서 대문 앞까지, 그리고 거실과 침대에 눕는다. 불 끄는 것을 까먹어 몸뚱이를 다시 일으켜 스위치를 누른다. 또 한 번 완전한 어둠. 늘 그렇지만 살짝 겁이 나서 핸드폰을 켠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다. 화면을 뒤적이다 딱히 할 게 없어서 핸드폰을 끄고 이불을 덮는다. 가장 어두운 때에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지금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하루를 반성하는 시간이다. 일 산에서 대치동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영단어를 암기하거나, 흐린 눈으로 사 람들의 신발을 응시한다. 글쓰기 학원은 교실이 좁다. 답답 한 공기 속에서 나는 열심히 눈을 굴리고 손을 놀린다. 컵라 면을 먹고 토론 수업을 받는다. 이번에는 입을 열심히 놀린 다. 정신없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말하고 하면 어느새 밤 열 시다. 내가 타는 열차가 그날의 막차가 된다. 나는 또 사람 들의 신발을 쳐다보거나, 녹초가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회사원들을 관찰한다. 가장 멀리 떨어진 내 방에도 불쑥 발을 내민다. 유리병의 뚜껑을 덮어버린다. 환했던 불꽃이 빠르지만 부드럽게 꺼진다. 어둠은 정적을 몰고 무겁게 내 어깨 위로 주저앉는다. 조금 무서워져 부엌 불을 켰다. 동시에 아빠의 요 란한 코 고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그래, 전등이 양초보다는 백 배 낫다. 파라핀을 묻히지 도 않고, 흉측한 강을 만들지도 않는다. 뜨겁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물 한 컵을 마시고 부엌 불을 끄니 다시 완벽한 어둠.벽을 더듬어 긴 복도를 따라 화장실로 향한다. 2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