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Circle Between The Lines March, 2014 | Page 72

불확실 _김 승혜 | 수필 아버지는 원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농악대의 일원으로, 언제나 상모를 돌렸다. 돈 을 벌기에 좋은 직업도 아니었고, 몸이 편한 직업도 아니었다. 요즘 사람들 말로 하자면 ‘막노동’쯤이 될 것이다. 선생님이나 회사원 같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는 ‘막노동’을 자처했다. 무슨 이유라도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에게 상모란 무슨 의미였을까? 몸이 점점 쇠약해져 가는데도 계속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그는 이 일이 하늘이 내게 맡긴 일이다, 하는 천명의식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고 나면 기뻐하 는 모습보다는 힘에 겨워 땀을 흘리는 모습이 더 많았다. 공중에서 수많은 회전을 하고 나면 만족감보다는 고통이 더 먼저 드러났다. 일을 마치고 나면 그의 얼굴은 고문이라도 받은 것 마냥 빨갰다. 그에게 상모란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을까? 몸을 비틀고 머리를 흔 들고 쉼 없이 뛰는 행위는 가히 고문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도 그는 원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내 아버지는 원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원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거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내가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길 희망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고 노력을 하 는 학생도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고 저녁이 되면 집에 돌아오는 무의미한 생활을 하는, 그게 바로 나였다. 집에 와도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까 지만 해도 집에는 늘 어머니가 계셨다. 그땐 어머니가 집에 있어도 괜찮았다. 그러나 어 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에서 알 수 없는 ‘찐득거림’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 다. 진짜로 무언가가 묻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찐득거림은 시간이 지나면서 흘러내리는 수준까지 치달았고 결국 어머니도 집에서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일을 나가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찐득거림’을 느낄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우 연히 엄마가 돈을 세는 것을 보았을 때. 난 그때 처음으로 찐득거림을 느꼈다. 찐득거림 이 그들의 노동, 죄책감, 역겨움, 부끄러움, 불안함 같은 것들이 섞인 것이라는 것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 아버지를 보았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온몸 에 찐득거리는 것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 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돼버렸다. 나는 그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것인가, 아니면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인가? 그도 나를 볼 때마다 찐득거림을 느낄까? 어찌 됐든 분명한 것은 하나 였다. 나에게 아버지는 ‘찐득거림’이었다. 여름이 되자 축제가 열렸다. 아버지가 가장 바쁘고 가장 돈을 많이 벌어오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곧잘 축제에 가곤 했다. 하지만 찐득거림을 안 후로는 발길을 끊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노동이 싫었고, 역겨웠고, 부끄러웠고, 불안했으니까. 그 날 도 난 축제에 가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 봤다. 기말고사 기간이었고 왠지 모르게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비어 있는 필기, 한구 석에 그린 낙서,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게 다가 설상가상으로 꽹과리 소리까지 가까워지고 있었고 결국 나는 패배자처럼 책을 덮 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보다 나가서 바 람이라도 쐬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집을 나갔다. 멀리 골목에서부터 농악대 무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7월의 날씨답게 하늘은 금방이라도 시커먼 비를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꽹과리 소리는 골목 여기저 기를 휘저었고 농악대를 뒤따르는 사람들은 어깨를 덩실거렸다. 내 속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아버지는 농악대 중간에서 상모를 돌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흰 천은